‘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대표되는 여성혐오 범죄를 부추기는 것은 여성 자체를 갈등의 원인으로 치부하는 문화다. 전통사회에서 여성이 말을 하면 복이 달아나기 때문에 여성은 말을 삼가야 한다는 것은 불문율이었다.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죽어도 ‘남편 잡아먹은 귀신’, ‘요물’ 등의 단어를 통해 여성을 모든 갈등 · 사건의 원인으로 바라보는 여성 혐오는 몇천 년을 이어져왔다.

이들의 연장선으로 현대 수많은 콘텐츠들이 여성혐오를 재생산하고 있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하 양평원)과 서울YWCA는 ‘2016 대중매체 양성평등 모니터링’를 통해 여성을 ‘갈등유발자’로 만드는 드라마 문화를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32편의 드라마 속 갈등유발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61.8%다. 더불어 ‘갈등해결자’는 남성이 64.2%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 드라마의 대부분이 남성 영웅 중심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 유설옥의 능력을 무시하고 ‘아줌마’라 부르며 윽박지르는 하완승(KBS 드라마 <추리의 여왕> 장면 갈무리)
이러한 현실들을 전복시키기 위해 드라마는 ‘여성 영웅’을 갈망한다.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 범죄들로부터 여성을 지켜줄 어떤 영웅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추리의 여왕>과 <힘쎈 여자 도봉순>이 바로 그 경우다. <추리의 여왕>에서는 가정 내 폭력, 연쇄살인, 속옷 절도 등 모두 여성이 피해자인 범죄가 나타난다. 더욱이 이들 사건은 남성 형사 하완승(권상우 분)의 눈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 민간인 프로파일러 유설옥(최강희 분)에게는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여성 대상 범죄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사건의 맥락을 짚어간다. 유설옥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를 열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유는 단순해요, 여자라서, 하필 그 자리에 있어서. 내가 그 사람들 꼭 잡을 거예요.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그 이유라도 알려줘야죠.”

<힘쎈여자 도봉순>은 영웅서사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도봉순(박보영 분)은 모계유전을 통해 괴력을 가진 ‘힘쎈 여성’이다. 그는 남들과 다른 자신이 싫지만, 여성혐오 범죄를 저지르는 범인을 잡는 과정에서 각성하게 된다. <힘쎈여자 도봉순>에 나오는 연쇄 납치범 김장현(장미관 분)은 여성들을 납치해 일곱 여자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내용의 연극을 보고 이를 따라하는 모방 범죄를 일으킨다. 그리고 여성들을 납치하고 반항하면 때리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 봉순은 김장현을 응징하는 과정을 통해 여성혐오 범죄가 만연한 이 사회에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영웅이 된다.

▲ 김장현의 범행을 막고 제압하려는 도봉순(JTBC 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 장명 갈무리)
밖에선 영웅, 안에선 여전히…

여성혐오 범죄가 더욱 힘을 얻게 되는 이유는 일상 속에 여성혐오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일상 속 여성혐오를 인식하고 극복하는 것이다. <추리의 여왕>과 <힘쎈 여자 도봉순>은 여성혐오 범죄를 극복하고자하는 의의는 돋보이지만 실상 인물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일상 속 여성혐오는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 주인공들은 바깥에서는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가정 내에서는 수동적인 여성이다. <힘쎈 여자 도봉순>에서 도봉순은 가정 내에서 남동생과 비교되고 차별당하는 신세다. <추리의 여왕>에서 유설옥은 가정에서 억압받는 주부로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적성에 맞지 않는 집안일을 강요당한다. 또한 하완승 형사는 유설옥에게 무시한다는 의미로 이름이 아닌 ‘아줌마’라는 호칭을 반복적으로 외쳐댄다. 이들은 밖에서는 여성혐오 범죄와 싸우는 영웅이지만 일상의 성차별과 여성혐오 앞에서는 여전히 약자다.

일상 속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고착화시킨 또다른 서사는 바로 ‘신데렐라 이야기’다. 가난한 여성이 잘나가는 남성을 만나 인생역전을 하는 이야기는 시대를 불문하고 나타나는 대표적인 성차별적 서사다. 양평원 또한 드라마 속에서 남성은 전문직 혹은 재벌로, 여성은 비정규직으로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방영된 22편의 드라마를 분석한 결과 남성은 주로 사장, 본부장, 의사, 변호사로, 여성은 취업준비생, 판매사원, 아르바이트생 등으로 묘사됐다. <힘쎈 여자 도봉순>과 <추리의 여왕>도 이러한 요소가 나타 난다. 여성 주인공들은 고졸이며 남성 인물의 도움을 받아 게임개발자, 프로파일러의 직업을 갖게 된다. 서울YWCA 황경희 간사는 “이는 여성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능력 있는 남성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성 고정관념을 고착화하는 주요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회에서 나타나는 남성 중심적 문화와 성차별적 고정관념이 드라마에 반영되고, 그것이 극화되면서 과장되고 재생산·확대되고 있다”며 “우리 사회가 성차별이나 여성혐오에 대한 감수성이 낮고, 그러한 문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차별적 내용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답습하는 드라마 문화를 없애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창작자와 소비자 모두 자라오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학습했기 때문이다. 주시청층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노골적으로 성차별을 당연시한다. 이승한 평론가는 “어려서 보고 배우며 자란 콘텐츠의 서사들이 대부분 성차별적 인식을 기반에 깔고 있다. 아무리 의식적으로 벗어나려고 해도, 창작자나 소비자 모두 그 익숙하고 친근한 패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는 어렵다”며 “오랫동안 반복되어 익숙하다는 건, 일단 쓰면 잘 팔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잘 팔리는 것이 보장돼 있다면 뭐라도 만드는 것”이라고 원인을 설명했다.

양평원과 서울YWCA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성차별적 방송에 대한 제재 강화, 방송제작자의 양성평등의식 강화를 들고 있다. 황 간사는 “방송을 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성차별적 장면을 없애고 성평등적 모습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방송을 제작하는 과정에서는 현실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사실들 중 무엇을 반영하고 무엇을 삭제할 것인지가 결정되고 또 그들의 해석으로 새로운 이미지들이 생산된다”고 설명했다.

 동시에 방송제작자에 대한 양성평등 교육이 이뤄져야한다. 황 간사는 “드라마 작가는 여성이 많지만, 피디, 국장, 투자자 등 최종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방송국의 제작환경 자체가 남성 중심적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차별적인 요소들이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 프로듀서, 여성 개발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국승인 기자 qkznlqjffp44@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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