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대신문
사회사회
지울 수 없는 상처, 지울 수 없는 과오
박은혜 수습기자  |  ogdg01@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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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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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서울시립대신문에서는 한·일 ‘위안부’합의의 역사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다뤘다. 하지만 ‘그 전시장’을 본 후로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취재하면서도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꼈다.
 ‘그 전시장’은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한 켠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다. “우리는 아시아의 전쟁이 낳은 같은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아래 편지를 쓴 B와 C들 중 하나가 남겼을 문구는 이렇게 이어지며 마무리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분들은 일본군에 피해를 당했고, 우리는 한국군에 당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는 전쟁의 피해자인 적도, 가해자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만은 눈을 가린 채 모른 척 하고 있다. 이번호에는 사과 받아야 할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사과를 받아야할 ‘그들’을 다뤘다. -편집자주-

일본과 베트남, 그 사이에서

A, B, C 씨는 모두 전쟁기간 중 상대국의 군인에 의해 성적 학대를 받았다. A씨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강길순 씨이고, B씨는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한국군에게 성적 학대를 받은 팜 티 한 씨, C씨는 익명의 베트남전 여성피해자다. 현재 강길순 씨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정부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청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여성 피해자들도 한국정부에게 지속적으로 공식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베트남 국민들의 목소리

지난 4월,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전 종전 43주년과 한국군 꽝남성 학살 50주기를 맞아 국회 기자회견, 시민평화법정 등 행사를 치르고 23일 마무리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베평화재단은 “3월에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한다고 해 공식 사과를 촉구했으나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유감을 표명하는 데 그쳤다”며 “한국 정부는 먼 길을 달려와 증언을 하는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의 존재를 외면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한베평화재단의 한국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모습은 작년 12월 27일에 여러 시민단체들이 2015한일합의 무효화를 주장하는 모습과 겹쳐 보인다. 과연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와 같이 반인륜적인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제대로 된 공식 사과를 하지 않았을까?

베트남전쟁, 역대 대통령들은 어떻게 바라봤을까

베트남전쟁 기간 중에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80여건, 이로 인해 약 9,000여 명의 민간인들이 집단학살 당한 것으로 집계됐다. 현재 베트남에는 3기의 ‘한국군’ 증오비와 50여 기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우리는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데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발언했고,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고 말했다. 2009년 이명박 전 대통령은 호치민의 묘소를 참배한 뒤, ‘우리 일행 모두는 베트남이 역경과 아픈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가는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은 베트남 국부인 호치민 묘소에 참배하고 헌화했으나 과거사와 관련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3월 23일에 베트남 국가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다만 청와대는 “공식 사과는 아니다. 역대 대통령 발언의 연장선”이라며 “참전 및 불행한 역사에 대한 포괄적 의미에서의 유감”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의 개인적인 발언만 있을 뿐,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와 배상이 이뤄지지 않았고 공식사과는 없었다.

그들의 교집합, 한국과 일본의 사과

2015년 12월 28일, 아베의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는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이며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했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범죄의 법적 책임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한국정부에게 해당 합의를 통해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철거하도록 노력하며. 향후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비난, 비판을 자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일본의 허울뿐인 사과 발언은 대한민국 국민의 격분을 샀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베트남전 피해자들에 대한 처세도 이와 다를 바가 없어 베트남의 격분을 사고 있다. 이에 베트남 외교부는 2017년 6월 12일에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하여 “한국 정부가 베트남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양국 우호와 협력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언행을 하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한국 국민을 향한 그들의 호소

꽝남 성 하미 마을에 사는 응우옌티탄(60·여)씨는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한국군에 의해 어머니, 남동생, 숙모, 두 사촌 동생을 하루에 잃었다. 그는 “우리는 살아서 이 자리에 서지 못한 피해자들 대신에 다시 한 번 한국 국민에게 호소한다. 한국 정부의 사과를 받고 싶다. 한국 정부는 한국군의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해 달라”고 힘주어 말했다. 대한민국도 스스로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면 일본과 다를 게 무엇일까? 

   
 

A의 증언
‘그곳’은 여러 방이 있었는데 저에게는 3호실이 주어졌습니다 그 방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는 두 장의 모포가 있는 나무침대가 놓여있었습니다. 저에게 그 방이 주어진 날부터 저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낮에는 병사 20명, 밤에는 장교 5~6명을 대상으로 성 노예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그곳’의 주인은 마당에 우리들을 모두 불러모았습니다. 매일 당하는 고통을 이겨낼 수 없어 도망치다 붙잡힌 사람을 처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마당 가운데로 끌어내어 유방과 음부를 칼로 도려내고 나중에는 목까지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들에게 ‘너희들도 반항하거나 도망치면 이렇게 된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엔 강물에 빠져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저는 ‘그곳’을 뛰쳐나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성공하지 못하고 붙잡혔습니다. 죽도록 매를 맞고 정신까지 잃었습니다. 그러자 군인은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음 호실로 끌고 들어가 강간을 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7호실에 있는 한 친구가 병사의 추악한 행위에 분격하여 그의 손을 물어뜯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여성의 뒤통수를 구둣발로 찼는데 얼마나 힘껏 걷어찼는지 그 여성의 눈알이 다 튕겨 나왔습니다. 모두가 달라붙어 가까스로 눈알을 밀어 넣었으나 그 여성은 영영 눈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래에 나와 같이 갔던 여성들 중에 살아나온 사람은 4명뿐이었습니다.

B의 증언
16살에 군사조직 활동을 시작한 저는 스무 살에 서류를 전달하고 나오는 길에 군인에게 붙잡혔습니다. ‘어디에 사냐’고 묻는 군인에게 이 마을에 산다고 했더니 집을 대라고 했습니다. 말문이 막힌 저는 군 부대로 끌려 갔고 그곳에서 온 몸에 전기가 흘러 몸이 뒤틀리는 듯한 끔찍한 전기고문을 당했습니다. 이후에 비행장 안의 부대로 옮겨졌는데 목욕을 하다가 강간을 당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뿌리치고 밀치며 저항했지만 군인은 입을 틀어막고 강간을 했습니다. 두 달 동안 세 번, 매번 다른 군인들에게 당했습니다.

C의 증언
전쟁이 일어났지만 저희 가족들의 일상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저의 두 딸과 함께 풀을 뽑고 있었습니다. 일에 열중한 사이 어느새 군인이 다가와 있었고 그들은 총을 겨누며 멈추라고 외쳤습니다. 당황한 저희는 군인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저희는 군 기지에 감금됐고 한 명씩 불려 나가 강간을 당했습니다. 눈을 가리고 뒤통수에 총을 겨눈 채 “너 적군이지?” 라고 물었습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 강간을 한 후에 감금했던 방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나이 든 여성들은 두어 번, 젊은 여자들은 계속해서 불려 나갔습니다. 몇 번을 불려 나갔는지 모르지만 2박 3일 동안 하룻밤에 7~8번 정도 불려 나갔던 것 같습니다. 저는 딸들이 불려 나갈 때마다 흐느껴 울며 기도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박은혜 수습기자 ogdg01@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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