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공정한 경쟁은 생각만큼 당연하지 않다.
사회적 소수자, 그들은 누구인가

사회적 소수자는 사회구성원 다수와 구분되어 사회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흔히 사회적 소수자로 규정되는 집단은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이 있다. 물론 이와 같이 특정 집단을 사회적 소수자로 분류하는 데에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며 시대나 지역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지기도 한다. 다만, 일반적으로 4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식별가능성이다. 소수자 집단은 신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른 집단과 뚜렷한 차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컨대 히잡을 두른 여성은 다른 여성들과 달리 대중 속에서도 쉽게 구별된다. 둘째는, 차별적 대우의 존재이다. 다른 모든 조건이 충족되는 데에도 불구하고 특정 성별, 특정 종교, 특정 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업 시 불이익을 주는 것이 그 예이다. 셋째로, 집단의식이다. 개별적인 이유로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집단에 속해있기 때문에 차별받는다고 느낄 때 그 사람은 소수자가 된다. 마지막 조건은 세력의 열세이다. 소수자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사회 다수보다 열세에 놓여있다. 이주 노동자들의 경우 이들을 대변해 줄 정치적 목소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대체로 자국민이 꺼리는 3D노동에 종사한다.

앞서 언급된 조건에 모두 부합할 때 그 집단은 사회적 소수자로 규정된다. 이들이 겪는 부당함은 ‘혐오의 피라미드’를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혐오의 피라미드는 총 다섯 단계로 구성된다. 특정 집단을 전형화시키고 배타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편견에서부터 시작해 편견에 기반한 욕설, 조소부터 폭행, 테러 등의 행위로 확대될 수 있다. 집단학살과 같은 극단적인 사건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경제, 정치, 교육상의 차별, 배제 등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    

 
기울어진 운동장 바로잡기

사회적 소수자가 겪는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바로 ‘소수자 우대조치’이다. 소수자 우대조치의 기원은 1964년 미국에서 제정된 <시민권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률에서 파생된 소수집단 우대조치라는 용어는 원래는 정부 관련 공공기관에서 피고용인을 차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고안됐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인종차별과 같은 차별적 대우를 받은 이들에게 보상과 혜택을 주는 정책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소수자 우대정책의 기본정신은  미국 존슨 대통령의 달리기 비유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존슨 대통령은 적극적 평등조치를 강조한 <행정명령 11246호>에 서명하면서 100야드 달리기 경주시합을 뛰는 두 선수를 예로 들었다. 한 선수는 두 다리를 묶고 달리고 있으며 이제 막 10야드를 달렸을 뿐이다. 두 다리가 자유로운 다른 선수는 이미 50야드를 달렸다. 이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까. 다리가 묶인 선수의 족쇄를 풀어 자유롭게 달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미 벌어져 있는 40야드의 차이를 메꿔줘야만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있다. 소수자 우대정책은 이 부분을 강조한다. 흑인은 지난 수백년 동안 차별받아 왔지만 이제 차별은 금지되었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지난날의 차별로 벌어진 경제적, 사회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어떠한 조치가 필요하지는 않은가? 소수자 우대정책의 의의 중 하나는 우리가 동등한 상황에서 경쟁하고 있지 않음을 상기시키면서 이를 바로잡으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상생을 위한 정의

19세기 영국의 비평가이자 사회사상가였던 존 러스킨(John Ruskin)은 그의 저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 금전적 관점에서만 ‘부’라는 용어가 통용되는 것을 비판하면서, 삶의 모든 영역에 ‘부’라는 용어가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는 일만큼이나 친절함, 호기심, 감수성, 겸손과 같은 덕목을 기르는 일도 중요하다. 그는 ‘나중에 온 사람’ 즉 사회적 약자도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사회가 가장 부유한 사회라고 역설했다. 물론 그의 새로운 관점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영국 언론은 그의 주장을 ‘공허한 히스테리 발작’, ‘견딜 수 없는 허튼 소리’등으로 묘사하며 조롱하였다.

그러나 러스킨의 주장은 현대사회에 들어서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엔에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세계 행복지수를 발표하고 있으며, 각국의 정치인들은 사회 전반의 신뢰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선진 복지국가들은 하나의 롤모델로 자리 잡았으며, 삶의 질(Quality of life)는 현대인의 주요한 관심사가 됐다. 더 이상 ‘사회가 효율적인 성장과 같은 단일한 가치에 매몰되어 삶의 다른 영역을 도외시하면 안된다’라는 주장은 허튼소리로 치부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성적이 좋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당연함’은 재고되어야 한다. 한 분야에서 유능한 사람을 뽑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의 다양성을 증대시키면서도, 사회를 조화롭게 통합시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 소수자 우대정책의 의의는 단순히 차별받은 집단에게 보상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소수자 우대정책은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광장으로 이끌어 냄으로써, 사회가 다양한 가치를 존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데에서도 그 함의를 찾을 수 있다.

공정성을 다시 생각하다

소수자 우대정책을 향한 가장 대표적인 반대의견은 소수자 우대정책이 역차별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역차별은 부당한 차별을 받는 쪽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가 너무 강해 오히려 반대편이 받는 차별을 말한다. 이들은 “차별은 금지되어야 하는데, 역차별 역시 (다수에 대한) 차별이므로 이를 허용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공정성’이다. 그런데 모든 차별이 공정성을 해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사회는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인정하지 않는 절대적 평등사회를 지향하지 않는다. ‘정당화되는 불평등’은 우리 사회에서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사회적 지위 분배에 기반을 이루는 능력주의 역시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에 해당한다. 우리는 특정 분야에서 우수한 성과를 낸 인물들이 사회를 주도해 나가야 한다는 데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노력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고 또 사회 전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동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다.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는 방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기원전 그리스 스파르타에서는 아테네인들을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으며, 양성애적 성욕이 왕성하고 탄탄한 근육질을 가진 남성이 명예를 얻었다. 중세시대 서유럽에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모범으로 삼으며 물질적인 부를 멀리하는 성자들이 추앙받았다.

그렇다면 이 사례들을 바탕으로 이렇게 반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는 방식은 최선인가?’ 이 질문은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회적 지위를 어떻게 분배하는 것이 좋은가?’라는 질문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좋은 사회를 이루기 위한 조건으로는 여러 가지이다. 사회의 다양성 확보와 계층적 갈등 완화 역시 그 조건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이를 위해 시행되는 소수자 우대정책 역시 공정한 조치이다. 

김세훈 수습기자 shkim7@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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