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나와 다른 정치인을 좋아하는 사람, 나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 그리고 나와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 다른 평가를 하는 사람,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 등이 있다.

‘저걸 왜 저런 식으로 생각하지?’, ‘왜 저걸 안 하지?’, ‘저건 뭐 하는 놈이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봤을 때 문뜩 갖게 되는 생각이다. 다른 생각의 존재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타인과의 갈등을 겪게 한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의 인생이 예측한 대로 흘러가길 원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편향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

편향적인 태도는 인생의 불확실성과 타인과의 충돌을 줄이는 데는 더 좋을 수 있다. 편향적인 태도는 우리와 다른 사고 자체를 회피하며 생겨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좁은 사고 속에 갇혀서 타인을 평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편향적인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을 더 강하게 배척하게 된다.

우리는 성격과 가치관이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며,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개인에게 발현되는 창의성이란 바로 그런 과정 중에 생겨난다. 편향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보는 대로만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고 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을 획일화시키고 다른 사고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사회에서는 혁신이 생겨날 수 없다. 사회의 개방성이 바로 혁신과 창의성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국과 소련, 한국과 북한, 중세와 근대를 가른 차이이기도 하다. 물론 획일화된 사회가 통치에는 효율적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발전하는 것처럼 보일 순 있다. 1970년대 소련과 분단 초기의 북한이 그랬다. 하지만 이 국가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고 뒤처졌다. 다양성과 다름에 대한 존중 없이 4차 산업혁명이니 혁신과 발전이니 말하는 것은 어불 상설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익숙한 것만 찾으려는 확증편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의도적으로 다른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하고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지만, 개인의 창의성은 그러한 갈등 과정에서 온전히 발휘된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과 집단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노력해야한다. 답답해도 꾹 한번 참고 한번 듣고 이해하려 해보자. 역설적으로 익숙함을 탈피하려는 시도는 인내에서 시작된다.


윤유상 보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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