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불안이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결론짓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안』에서 말하는 대로 사랑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냉소적인 사람이라도 마음 한 켠에는 누군가 자신의 생각에 공감해주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다. 부모는 아이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아기는 울음을 터트리거나, 몸을 버둥거리는 것만으로도 부모에게 사랑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아기가 자라남에 따라 이러한 무조건적 사랑은 사회적 성취와 관련을 맺기 시작한다. 이제 사랑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을 때’, ‘좋은 직장에 들어갔을 때’, ‘다른 사람들이 선망할 만한 능력을 갖췄을 때’에만 요구할 수 있는 조건부 사랑으로 바뀐다.

물론 조건부 사랑을 얻는 과정은 험난하다.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지적했듯, 현대는 ‘할 수 있다’가 지배하는 긍정의 시대다. 현대인에게 ‘할 수 있다’라는 주문은 ‘해야 한다’라는 강박으로 다가온다. ‘성공학’으로 대표되는 자기계발서들은 우리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사회적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다고 부추긴다. 거기에 더해 미디어는 유명인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전파하면서 대중적 관심을 받는 것이 얼마나 환상적인 일인지 역설한다.

그래서 우리는 경쟁자들을 끊임없이 곁눈질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행여나 자신이 ‘낙오자’의 대열에 합류한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의 노력이 반드시 보상받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성공은 여러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요인들을 충족시킨 소수만이 쟁취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좌절을 경험하고 그러한 실패의 대가로 ‘사랑을 요구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것은 아닌지 불안에 떤다. 

불안을 어떻게 다독일 수 있을까. 저자는 불안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로 ‘예술’을 제시한다. 과거부터 예술가들은 세속적 가치를 숭상하는 사회와 가치의 유격전을 벌여왔다. 예술은 사람을 바라보는데 돈, 권력, 명예와 같은 단일한 필터를 적용하는 것을 반대하며, 우리에게 조금 더 세심한 판단기준을 가지라고 종용한다. 예술가들은 부와 권력이 개인의 능력과 성품에 따라 공정하게 분배된다는 가정을 희극적으로 풍자한다. 예술에서 권력자가 아둔하고 탐욕스럽게 그려지고, 보잘 것 없는 지위를 가진 사람이 고귀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뒤흔들려는 의도의 산물이다.

사회의 가치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외에도 예술은 실패한 자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임으로써 슬픔에 잠긴 삶을 위로한다. 우리는 비극작품을 통해 평범한 인간이 운명의 장난에 의해, 혹은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결함에 의해 파멸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SNS와 비극은 양극단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전자를 보면서 느끼는 주된 감정이 화려한 삶을 향한 부러움과 소외감이라면, 후자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공감과 연민이다. 나의 삶만 지리멸렬한 것이 아니라 삶은 본래 어느 정도 지리멸렬한 것이라고 느낄 때, 우리의 불안은 누그러질 수 있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저자가 소개한 ‘보헤미안’의 역사를 참고해 볼 수도 있다. 19세기 서구사회에는 자신을 보헤미안이라 칭하는 흥미로운 집단이 나타났다. 이들은 사업이나 사회적 성공보다 예술과 감정에 충실한 생활을 숭상했고, 대체로 우울한 기질을 가졌으며, 무엇보다 부르주아지를 싫어했다. 보헤미안들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사람들의 평가에 쉽게 휘둘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컨대, 모든 것을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하는 데 혈안이 된 부르주아지 사이에서 돈이 아닌 다른 가치척도를 제안하는 것은 비웃음을 살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보헤미안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공유할 집단을 구성했다. 이들은 연대를 통해 세속 사회에서 자칫 ‘정신 나간 몽상가의 헛소리’로 치부될 만한 주장들을 모아 하나의 시대적 조류를 형성했다. 이들은 예술, 감수성, 창조성과 같은 가치가 질서, 규칙, 시간 엄수와 같은 가치와 동등한 위치에 놓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보헤미안들이 훌륭한 선례를 남겨놓은 덕분에, 사람들은 돈과 좋은 평판을 추구하는 삶 대신 여유를 가지고 예술을 찬미하는 삶을 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소확행’이나 ‘YOLO’와 같은 삶의 방식들에서 보헤미안의 유산을 확인할 수 있다.
     
어느덧 겨울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왔다. 연말이라는 시기와 쌀쌀한 날씨가 맞물리면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들면서 무언가 반성해야 할 것만 같다. 한 해를 되돌아보며, 뿌듯함과 성취감보다는 왠지 모를 아쉬움과 불안함을 느끼는 이들에게 이 책의 복용을 권한다.


김세훈 기자 shkim7@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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