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혁이 태영에게 휴대전화를 건넨다. 기주를 마음에 둔 태영이지만 그 전화기를 사용한다. 한편 윤아는 기주에게 파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그 약혼반지를 끼고 다닌다. 수혁과 윤아를 아랑곳하지 않는 기주와 태영은 길거리에서 돼지저금통을 끌어안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데이트한다. 이 모든 상황은 기호학으로 분석할 수 있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signe)는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e)로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한 송이 장미’라는 기표에 ‘애틋한 마음’이라는 기의가 결합되면, 그 장미는 더 이상 자연물이 아닌 하나의 기호가 된다. 이렇게 발화자가 기표와 기의를 결합하여 하나의 기호를 만드는 행위를 ‘기호작용’이라고 하고, 그 전달된 기호를 기표 삼아 해석자가 다시 나름의 기의를 결합하는 행위를 ‘기호해석’이라 한다.

이 두 가지 의미작용이 일치할 것을 기대하고 쌍방이 참여하는 행위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다. 이때 두 방향의 의미작용은 서로 독립적인 것이므로, 의미는 전달되거나 소통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재생산에 의해 공유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은 ‘의사소통’이라고 번역되기보다는 ‘의미공유’라고 번역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위의 예에서 각각의 사물들 ‘휴대전화’, ‘약혼반지’, ‘돼지저금통과 아이스크림’은 기표이다. 여기에 다양한 기의를 결합하면 그것들은 더 이상 단순한 사물이 아닌 기호가 된다. 수혁에게 그 전화는 ‘애인에게 채우는 사랑의 족쇄’였지만 태영에게는 그저 ‘비싸서 버리기 아까운 전화기’일 뿐이다. 기주에게 그 반지는 ‘거치적거리는 금붙이’일 뿐이지만 윤아에게는 ‘기주와 결혼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기표를 통해 각각 두 번의 의미작용이 일어났지만 의미공유는 실패했다. 그러나 ‘돼지저금통과 아이스크림’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기주와 태영의 의미작용은 일치했다. 시청자들 역시 그 장면을 보면서 ‘소박하지만 행복한 데이트’라고 생각했다면 작가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한 것이다.

옐름슬레우는 실재의 장미와 ‘장미’, ‘rose’등 언어 표현이 결합되어 발생한 객관적 의미를 외시(denotation), 장미에 ‘사랑’, ‘고통’ 등의 기의를 결합해서 발생하는 주관적 의미를 공시(connotation)라고 구별한 바 있다.

소쉬르와 옐름슬레우의 영향을 받은 롤랑 바르트는 대중문화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대중문화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자 한다. 그는 자연스러운 것 또는 당연한 것으로 호도된 사회의 상식 · 고정관념 · 이데올로기를 ‘신화’라고 부르면서, 신화는 생산자의 어떤 동기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만 일단 그것을 공유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나면 소비자는 그 신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비판한다.

‘돼지저금통’이 연인들 사이에 주고받아야 하는 필수적인 선물처럼 둔갑한 적이 있다. 좌판에는 “파리의 연인 大할인: 12,000원→9,800원”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돼지저금통’에 ‘한계를 초월한 사랑’이라는 신화를 결합함으로써 판매량을 늘려보려는 상인들의 속셈이 숨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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