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4년 태조 이성계가 서울(당시 한양)로 천도하고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제병합 되기까지 517년. 1910년 일제강점기에서 1945년 8.15 해방으로까지 36년. 1948년 제1공화국 출범으로부터 2019년 현재까지 72년. 역사 속의 이들 기간을 합친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625년(517+36+72=625)’ 바로 이들 모든 역사와 함께한 도시로서의 ‘서울’의 나이입니다. 조선시대를 거쳐 2019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중과 함께한 600살의 서울을 소개합니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한양으로의 천도를 실행했습니다. 이전부터 오랜 기간 도읍의 기능을 유지해온 개경을 대신해 서울이 국가의 최고(最高) 도시 반열에 올라선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경복궁과 종묘, 광화문, 서울사대문 등 오늘날 서울의 랜드마크가 이 시기에 건축됐고 서울은 도시기반을 갖춰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울은 도시역사의 무대 한 가운데에 남아 민족의 역사와 함께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는 등 국가적인 위기 속에서도 서울은 그 위상을 잃지 않았습니다. 서울은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공간이었고 모든 골목에서 공원에서 또 광장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내보냈습니다. 36년간의 일제강점기간 동안 서울은 끊임없이 고통 받았지만 민중과 함께 이를 극복했고 8.15 해방을 통해 우리들 곁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일제에 의한 억압과 탄압의 시대는 끝났지만 서울과 민중을 향한 폭력은 형태를 바꾸어 끊임없이 되돌아왔습니다. 전쟁의 모습으로, 또 군부독재의 이름으로.

▲ 1980년 5월 15일, 군부의 계엄 해제와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며 서울역 앞에 대학생 10만여명이 운집했다.(서울의 봄)
1950년 6월 28일 새벽,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의 한강을 가로지르는 인도교가 국군에 의해 폭파됐습니다. 미처 피난가지 못한 시민들을 뒤로하고 국가의 지도자들은 수도 서울을 떠나갔습니다. 국가는 서울과 민중을 대차게 외면했지만 이들은 3개월의 점령기간을 침착하게 견뎌냈습니다. 이후 밀고 밀리는 전선의 이동에서 서울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깊은 전쟁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전쟁 끝에 서울은 만신창이의 몸으로 국가와 민중 곁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1961년 5월 16일 4.19 혁명의 열기가 1년도 채 안 돼 군인들의 군화가 서울의 광장을, 공원을, 골목을 밟았습니다. 민중의 열기는 식었고 자유, 인권 등 모든 기본권이 통제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과 민중은 다시 한 번 억압 아래 놓였습니다.

1979년, 수 발의 총탄 소리와 함께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절대권력이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이듬해 서울은 민중과 함께 다시 봄을 맞았고, 민주정부 수립에 대한 목소리가 서울 전체에 울려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유난히도 짧았습니다. 권력의 공백을 메운 것은 민중이 아니라 또 다시 군부였습니다. 18년 전 그랬던 것처럼 다시 군인이 나서 민중의 열기를 눌렀습니다. 서울과 민중의 희망과 기대는 다시금 꺾였습니다.

1987년 6월, 서울은 대통령의 호헌(護憲) 선언에 반발하는 민중의 대규모 시위로 가득 찼습니다. 대학생부터 직장인에 이르는 150만 명의 사회각층 민중이 시위에 참여했고 이들은 서울의 거리와 중심지를 가득 메웠습니다. 6월 29일, 여당 측 대통령 후보자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민주화 요구를 수용했습니다. 27년 간 억눌려왔던 서울과 민중은 다시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주권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2019년, 서울은 여전히 민중 곁에 있습니다. 서울과 민중을 향한 폭력은 다시 모양을 바꿔 돌아올 테지만 1천만 시민과 오랜 기간 함께해 온 서울은 더 이상 억압의 서울이 아닙니다. 시민이 주체가 되어 도시에서 상생하고 도시를 가꿔나가는 민중의 서울이기 때문입니다.


성기태 기자 gitaeuhjin033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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