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세상을 보는 창.’ 벽을 넘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창은 중요하다. 아니 중요했다. 온갖 미디어 매체와 정보가 넘치는 현대사회에서 마음만 먹고자 하면 얻지 못할 정보는 없다시피 한다.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벽’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벽이 없으니 ‘창’은 없어도 되지 않는가.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본다면 나는 딱 잘라 말할 것이다. ‘아니다.‘ 벽이 없기에 창은 더욱 중요하다. 넘치는 정보들 속에서 알아야 할 정보를 선택해주는 곳. 자칫 한곳에만 매몰될 수 있는 시선에게 다른 방향도 알려주는 곳.

글을 씀에 있어서 공정한 시선을 가지고 다양한 주제를 다뤄야 할 이유다. 신문 자체가 하나의 시선에 매몰되어 버린다면 독자들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따라서 때로는 신문은 여론에 반할 수밖에 없다. 여론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때로는 다른 시선도 다루어야 할 의무 때문이다. 내 입사 지원서에는 ‘신문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적혀 있다. 그 문장을 적은 후 곧 후회했다. 면접 때 편집국장이 이 문장을 가지고 계속 꼬투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람이 쓰는 글이 기계적 중립을 지킬 수 있는가. 만약 기계적 중립을 지켰더라도 그것이 좋은 글이라 볼 수 있겠는가. 당시에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입사 6개월이 지난 지금 그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신문의 중립성은 어디서 오는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이 글의 위에 있다. 다양한 시선을 다루는 것이다. 기계적 중립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정한다. 그렇다면, 기계적 중립이 불가능하다면, 다양한 시선들을 소개하면 되지 않을까. 다양한 시선을 소개하고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신문의 역할이 아니던가. 보수를 다뤘다면 다음엔 진보를 다루는 것처럼.
 

최강록 기자 rkdfhr1234@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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