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혈통과 가문을 중요하게 여겨왔다. 따라서 입양을 하는 것도 아이의 행복을 위한 입양이 아니라 가문의 유지를 위한 입양이었다. 그 후에 외세의 계속된 침략과 전쟁으로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홍역을 치러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적 빈곤으로 아이가 버려지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버려진 아이들을 수용할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던 우리 사회는 ‘국외 입양’이라는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시작됐지만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외로 입양되는 아이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국외 입양의 이유로 우리의 경제적 빈곤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넘는데도 해마다 2천 2백에서 2천 4백 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아 수출국’이라는 부끄러운 이름도 갖게 됐다.

우리나라는 ‘가족 혈통주의’가 강해 아이를 입양해도 주변에서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가 입양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버려진 아이들은 입양아에 대해 인식이 비교적 포용적이며 제도적으로도 잘 보장되어 있는 국외로 입양된다. 하지만 입양된 아이는 어떨까. 국외 입양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입양아들의 30% 정도만 현지에 잘 적응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으로 생활한다고 한다.

얼마 전 국내 한 연예 프로그램의 ‘사랑의 위탁모’라는 코너를 통해 ‘국내 입양’이 크게 여론화된 적이 있다. 이후 국내 입양을 하려는 사람의 수가 예전에 비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하지만 여전히 입양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이 변모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아이가 자라면 생부모를 찾아갈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혈연 관계가 얽히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남’으로 규정해버리고 있다. 과거 전통과 혈연에 의존하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임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어 간절히 아이를 갖기 원하는 가정이 있을 수 있지만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는 입양을 원하는 많은 이들을 주저하게 만든다.

‘버려진 아이들’이기 전에 ‘하나의 인격체’인 입양아들. 그들은 어쩌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운명이 결정됨으로써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게 존중되어야할 권리를 침해당했다.

마지막 남은 인권까지 빼앗긴 그들을 적어도 저 먼 타국이 아닌 우리 사회 속에서 보듬어줘야 하지 않을까. 입양아들이 ‘사회적 천덕꾸러기’가 아닌 아이를 원하는 부모들에게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소중한 선물’로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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