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국회의원 선거(이하 총선)가 다가왔다. 국회의원은 입법부의 구성원이자 국민의 대표자다.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으로 법령의 제·개정과 조약의 비준 및 폐지를 담당하고 국민을 대표해 국가 예산안을 심의·확정하는 역할을 한다. 삼권분립 하에 사법부에게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고 행정부 활동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기구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총선에 갖는 관심은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을 뽑는 선거(이하 대선)보다 현저히 낮다. 2012년 제18대 대선 투표율이 75.8%인 반면 같은 해에 치러진 제19대 총선의 투표율은 54.2%, 2016년에 치러진 제20대 총선은 58%에 불과했다.

교과서 내 한국 현대사 역시 행정부와 대통령 선거제도의 변화에만 주목해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 역시 계속 변하며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총선은 결코 가볍게 인식될 투표가 아니다. 한국현대사 속 총선과 입법부의 역사를 통해 입법부와 총선의 중요성을 알아보자.

단독 선거냐 합동 선거냐 그것이 문제로다

총선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우선 광복 직후 국내 상황을 알아야 한다. 1945년 광복 이후 우리나라는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북 지역은 소련군정이, 이남 지역은 미군정이 통치했다. 이후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2차례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를 거쳐 한반도내 정부 수립문제는 국제연합(이하 UN) 총회로 이관됐다. 여기서 남북한 총선거가 결의돼 정부 수립과 미소 양군의 철수를 감시·협의할 기구로 UN 임시위원단이 한국에 파견됐다. 그러나 위원단의 38도선 이북지역 진입은 소련에 의해 실패하고 만다.
이에 UN의 보조기구인 UN 소총회가 열렸고 선거가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총선을 실시하자는 미국의 결의안이 받아들여졌다. 결의안에는 38선 이남 지역에서라도 UN 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선거를 실시하며 총선으로 선출된 대표자로 국회를 구성해 한국정부 수립의 토대로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마침내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이 실시됐다.

▲ 제헌국회 총선 포스터,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민주선거를 홍보한 포스터다.

제헌국회, 국가의 틀을 만들다

선거실시는 미군정이 맡았다. 미군정은 남조선과도입법의회에 의해 제정된 입법의원선거법을 기초로 국회의원선거법을 공포했다. 해당 선거법에 의해 자유, 평등, 비밀 선거 원칙과 임기 2년에 200명이라는 국회의원 정원과 임기에 관한 내용이 규정됐다. 또한 첫 선거인만큼 총선을 위한 선거인, 즉 유권자 등록이 실시됐다. 그 결과 780만 여명의 선거인 명단이 만들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첫 총선이 치러졌다. 이때 제주도는 4.3사건으로 인해 다음해에 총선이 치러질 수 있었다. 첫 총선은 95.5%라는 역대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이후 선거법에 따라 최고령자였던 이승만이 첫 임시국회의장을 맡게 된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첫 총선이 치러졌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주선거로 같은 해 7월 20일에 치러진 첫 대선보다 2달이나 앞선 것이었다. 총선이 대선보다 먼저 치러진 이유는 정식 정부 수립에 앞서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기틀, 정부의 형태와 기원, 가치관 등은 모두 헌법을 통해 규정된다. 정부 수립을 위한 근거 역시 이에 해당된다. 7월 17일 제헌국회는 제헌헌법을 반포한다. 기미만세운동과 임시정부 계승 이념을 명시하고 정부 형태를 간선제를 통한 4년 중임의 대통령제로 하는 등 대한민국의 기틀이 잡힌 순간이었다. 이렇듯 제헌국회는 광복 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주역이었다. 행정부를 비롯한 대한민국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제헌총선의 결과로 규정되고 만들어진 것이다.

총선, 혼란한 한국현대사를 그대로 반영하다

제헌 국회의원들의 임기는 이후 국회의원들과 달리 2년이었다. 제헌국회 선거는 미군정이 만든 법안에 따라 시행됐기에 그 안에 다음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선거법을 마련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제헌국회는 1950년 4월 10일 정부가 제출한 국회의원선거법을 심의하고 수정한 후 통과시켰다. 이렇게 제정된 선거법은 국민이 각 선거구에 출마한 국회의원 후보를 직접선거하고 최다득표자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국회의원선거법은 1994년 3월 ‘공정선거 및 선거부정 방지법’이 제정되기 이전까지 개정을 거듭해왔다. 더 깨끗하고 민주적인 선거를 치루기 위한 개정도 있었으나 주로 집권세력이 장기 집권하려는 의도가 반영됐다. 장기 집권을 실현하려면 대통령 임기를 제한하는 등 장기 집권에 방해가 되는 법들을 개정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집권 세력이 입법부인 국회를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국민의 대표를 뽑는 총선에 민심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해 총선이 갖는 민주적 정당성이 크게 훼손됐다. 대표적인 예시가 제1공화국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제4공화국 시기 박정희 정부가 도입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유신정우회의원선거’였다. 해당 시기 총선 과정과 선거제도의 변화에는 굴곡진 한국현대사가 그대로 반영돼있다.

독재세력, 총선과 입법부에 손 뻗다

1950년 제2대 총선 결과는 이승만 정부에게 재앙이었다. 당시 대통령 선출방법은 국회에서의 간선제였는데 이승만에 반하는 무소속 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1952년 1월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하려했으나 국회에서 기각됐다. 결국 같은 해 5월 이승만 정부는 전쟁 중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다. 크레인으로 국회의원들이 탄 통근버스를 들어 올려 그대로 납치하는 한편 경찰력을 동원해 야당의원들을 국회에 감금한 후 발췌개헌을 통과시켰다. 발췌개헌을 바탕으로 이승만은 연임에 성공해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승만 정부의 행태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다음 총선에 개입하기에 이른다. 경찰 100명으로 조직된 대한정치공작대를 동원한 ‘대한정치공작대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당시 제1야당이었던 민주국민당(이하 민국당)이 간첩과 밀통해 이승만을 죽이려 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을 의심한 검사들에 의해 사건이 조작됐음이 드러났으나 여당의 하수인들이 야당을 붕괴시킬 뻔한 사건이었다. 그 외에도 경찰인사 이동을 단행해 경찰에 이승만 세력을 심고 민국당의 선거 운동을 방해하는 등 당시 집권 여당의 총선 개입은 심각했다.

박정희 정권은 국회의원 선거를 기존에 이뤄지던 선거구 바탕의 직접 선거와 대통령이 추천한 후보들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구를 통해 간접 선출하는 유신정우회의원 선거로 나눴다. 유신정우회의원이 차지하는 의석수는 국회 전체 의석의 3분의 1로 웬만하면 집권 세력이 다수를 점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이 제도로 인해 집권 세력은 불리했던 선거에서 과반수를 차지했다. 제10대 총선 중 지역구선거에서 야당이었던 신민당이 유효득표총수의 32.8%를 획득해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획득한 31.7%보다도 높은 최고 득표율을 기록할 정도로 우세를 보였다. 지역구선거를 통해 두 정당이 차지한 의석수 역시 민주공화당 68석, 신민당 61석으로 비슷했다. 그러나 유신정우회 선거를 통해 전체 231석의 3분의 1인 77석을 가져가며 집권세력은 여유롭게 국회 과반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박정희 정권은 거리낌 없이 유신체제 독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 오는 15일 시행되는 제21대 총선 포스터, 제헌국회 총선 포스터를 본 따 제작했다.

총선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의견표출 수단

이렇듯 총선이란 독재정권이 갖은 수작을 쓸 정도로 굉장히 중요한 선거다. 총선의 결과에 따라 정권은 힘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입법부는 행정부를 견제하고 막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구다. 입법부가 무력화된다면 국민이 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직접 거리로 나서 항의하고 대통령이 항의를 받아들여 스스로 하야하기를 기다리는 것만 남게 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하야 과정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과정을 비교하면 이러한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스스로 물러나는 것을 거부한 대통령을 탄핵하는 일은 국회를 거쳐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총선은 국민이 자신들의 정치 의견을 보여주는 수단 중에서도 가장 힘 있고 온건한 수단이다. 총선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심각한 훼손을 입게 된다. 한국현대사 속 독재정권이 총선과 입법부를 장악했던 한국현대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자신에게 쥐어진 한 표의 무게를 알고 민주주의와 우리 자신을 위해 총선에 임하자.

참고: 이임화, 『1950년 제2대 國會議員 選擧에 관한 硏究』, <成大史林>, 1994.
김도협,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변천에 관한 고찰(Ⅰ)』, <土地公法硏究>, 2009.


이길훈 기자 greg0306@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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