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취재 연재 1 - 역사의 파도 속을 살아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서울시립대신문에서는 지난 겨울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등 러시아 주요 도시를 취재 차 다녀왔다. 이번 해외취재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작곡가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Дмитрий   Дмитриевич Шостакович,  1906 ~ 1975)에 대해 다뤘다. 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레닌그라드 공방전 75주년을 맞아 역사 속을 헤쳐나간 쇼스타코비치의 일생과 음악 이야기를 살펴봤다.   -편집자주-

 
 
1905년 1월 9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광장 앞. 노동자들은 일요일 예배가 열리는 성당 대신 차르(러시아의 황제)가 살고 있던 궁전 앞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훗날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사건의 시작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기술·경제적으로 뒤처진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절대왕정을 바탕으로 한 차르와 주변 귀족의 사치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861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발표한 농노 해방령 이후 귀족 지주들에게서 ‘해방’된 농민들은 지주로부터 땅을 사야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재산은 땅을 사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비싼 토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많은 농민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낮은 임금과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다. 1896년 5월에는 차르의 대관식이 끝난 뒤 주는 선물을 받기위해 축제 장소로 지정된 호딘카 들판에 50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가 2천 명이 깔려 죽는 ‘호딘카 들판의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불만이 극에 달하자 1월 9일 일요일 가폰이라는 러시아 정교회 신부가 ‘민중이 호소하면 차르가 자비를 베풀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모았다. 약 6만 명의 사람이 행진에 가담했다. 행진의 가장 앞에는 차르의 초상과 십자가가 걸려있었고 사람들은 황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궁전으로 향했다. 행진에서 요구한 것은 임금 인상과 8시간 근로제 도입이었다.

▲ 러시아 제국 순양함 아브로라(Аврора ). 이 배는 1917년 10월 혁명 당시 붉은 깃발을 내걸고 대포를 발사했다. 당시 세워졌던 우파 중심의 임시정부에 압박을 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황제의 자비가 아닌 근위대의 총탄이었다. 당시 궁전을 지키고 있던 근위대의 발포로 최대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러시아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전복될 때까지 혼란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훗날 위대한 작곡가가 되는 쇼스타코비치도 이 시기에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혁명 후 1년 뒤 태어나 혁명의 영향 속에서 자라났다. 유년기의 기억은 그에게 인상적으로 남았던 듯하다. 그는 50세가 되고 나서 어렸을 때 들었던 혁명 이야기를 음악으로 다시 그려냈다. ‘교향곡 제11번 <1905년>’은 앞서 설명한 피의 일요일 사건을 음악으로 풀어내고 있다.

‘궁전 광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1악장은 동이 트기 전 조용한 광장을 묘사한다. 일요일 예배를 올리는 찬송가 소리가 들린다. 이어 당시 죄수들이 불렀던 노래 ‘붙잡힌 사람’과 ‘들어주시오’가 네바 강 건너 감옥에서 들려온다. 군대의 기상 나팔 소리도 들린다.

조용했던 궁전광장은 ‘1월 9일’이라는 제목이 붙은 2악장에 들어서자 혼란에 휩싸여 간다. 피의 일요일이 시작됐다. 쇼스타코비치가 같은 주제로 작곡했던 합창곡 ‘1월 9일’의 멜로디 중 ‘차르, 우리들의 아버지시여’, ‘모자를 벗으시오’ 두 대목이 제시되며 사람들의 행진을 보여준다.

1악장에서 나왔던 군대의 나팔소리가 엮이며 분위기가 고조된다. 이 소리가 잦아들고 한 차례의 불안한 정적이 거쳐 간 뒤, 트럼펫 소리가 군대의 접근을 알린다. 이후 점점 커지던 소리는 절정에 다다르고 군대의 모습을 상징하는 스네어 드럼, 팀파니, 트럼펫 소리와 함께 아비규환의 현장을 묘사한다.

군대의 발포 뒤, 광장은 다시 침묵에 휩싸인다. 1악장의 조용한 광장의 모습이 다시 한번 제시된다. 하지만 광장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중간중간에 군대의 나팔소리와 아직 광장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탄원하는 소리가 들리며 2악장은 끝이 난다.

▲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과 그 앞 레닌 동상의 모습. 레닌은 혁명이 발발하자 망명지였던 영국에서 기차를 타고 이 역으로 들어왔다. 6개월 뒤,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정은 무너진다.

3악장의 제목은 ‘영원한 기억’이다. 이는 동방 정교회의 추도기도 마지막에 사용되는 문구로 죽은 이를 기리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제목에 맞게 3악장의 주제는 추모와 기억이다. 악장 초반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혁명 당시 장송행진곡으로 불렸던 ‘그대 쓰러진 희생자여’라는 혁명가다. 쓰러진 사람만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비극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듯 2악장에서 군부대를 묘사했던 부분이 3악장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혁명 참여를 독려하는 노래도 제시된다.

4악장은 ‘폭군에게 분노하라!’라는 제목의 혁명가로 시작한다. 총에 맞은 동료, 친구를 본 민중이 차르로부터 등을 돌렸다. 저항은 멈추지 않는다. 현악의 거친 합주로 혁명가 ‘바르샤바 시민들’이 나온다. 다양한 혁명가를 비롯한 앞선 악장의 주제들이 엮이며 발전한다. 혁명가가 멈추면 광장은 다시 침묵에 휩싸인다. 이후 2악장에 나온 합창곡 ‘1월 9일’의 선율이 잉글리시 호른 독주로 다시 한번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거칠게 고조된 분위기 속에 ‘경종’을 상징하는 종소리가 울리고 다시 찾아올 혁명을 암시한다.

이 곡은 공산주의 혁명을 묘사한다는 이유로 오랜 기간 우리나라에서 연주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 곡은 우리의 현대사와 매우 닮아있는 곡이기도 하다. 1악장의 광장이나 2악장의 탄압, 3악장의 추모와 4악장의 저항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만일 우리나라에도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작곡가가 있었다면 ‘교향곡 11번’과 비슷한 음악이 한 곡 정도는 나오지 않았을까.

 

 
1936년 1월 28일 소련 아르한겔스크 기차역 앞 신문 가판대. 연주 여행 중이던 쇼스타코비치가 친구들과 함께 얼어붙은 손을 녹이며 그날 발행된 <프라우다>(Правда, 소련 공산당 기관지) 한 부를 집어 들었다. 신문을 살피던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은 없고 혼란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견한다. 그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하 ‘맥베스 부인’)이 퇴폐적이고 자본주의적, 형식주의적이라는 비난이 담긴 기사였다. 해당 기사에는 기사를 쓴 기자 이름이 없었다. 이는 그 기사가 당의 공식적 입장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맥베스 부인’은 1934년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됐다. 그 기사가 나오기 2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고 즐거워했다. 2년간 레닌그라드에서 83번, 수도 모스크바에서는 97번이나 공연되며 성황을 이뤘다. 영국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로도 수출되며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오페라로 자리잡았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미하일로프스키 극장 박물관에 있는 쇼스타코비치 오페라 ‘코’(Нос) 무대 모형. 쇼스타코비치는 이 오페라로 큰 명성을 얻었지만, 두번째 오페라였던 ‘맥베스 부인’이 당국의 비판을 받으면서 위기에 몰린다.

그러던 어느 날,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맥베스 부인’을 보러 극장을 찾았다. 공연에서 금관악기가 큰 소리로 연주할 때마다 스탈린과 그의 친구들은 움찔거렸고 공연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이후 ‘맥베스 부인’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로 뒤집혔다. <프라우다>의 기사 하나로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평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상징인 인민 예술가’에서 ‘자본주의적이고 형식에만 집착하는 인민의 적’으로 변했다.

당시 소련 예술계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집착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1930년대 초반 시작된 예술 이념으로, 예술은 이 이념 아래에서 노동자를 사회주의 정신에 맞춰 변화시키고 교육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이를 위해 예술은 노동자가 이해하기 쉬워야 했으며, 이상적인 사회주의의 모습을 담아야 했다. 그러나 거창한 목표와는 달리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당의 입맛에 따라 예술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작곡가가 자신의 개성을 담아 곡을 내면 ‘인민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형식주의적 음악’이라며 비판받았다. 반면 비판을 반영해 인민의 현실적인 모습을 음악으로 만들면 되려 ‘사회주의의 이상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생기고 난 뒤에는 당이 원하는 획일적인 작품만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프로코피예프나 스트라빈스키 등 당대 소련 음악계의 대가들이 이 시기를 전후로 활동에 제약을 받거나 서방권으로 망명했다.

‘맥베스 부인’이 비판받은 지 1년 뒤, 소련은 대숙청의 광풍에 휩싸이게 된다. 정계나 사회, 군대에서도 사람들이 숙청됐다. 쇼스타코비치의 친구들도 영향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의 절친한 친구인 붉은 군대의 투하쳅스키 원수가 체포됐다. 그가 독일의 스파이라는 조작된 증거 때문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친구라는 이유로 비밀경찰 본부가 있는 루뱐카로 잡혀갔다. 그는 투하쳅스키와 어떤 말을 나눴냐고 추궁당했다. 오랜 조사 후 ‘다음 주 월요일까지 잘 생각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풀려났다. 월요일 쇼스타코비치가 루뱐카를 다시 찾았을 때 자신을 담당하는 조사관은 그 자리에 없었다. 주말 사이 조사관이 ‘반동분자’라는 이유로 체포당했기 때문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위기를 벗어났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서 많은 사람이 사라졌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 가사를 붙여준 작사가는 처형되고, 무용가는 강제수용소에 붙잡혀갔다. 그는 ‘교향곡 제4번’을 완성했지만,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었다. 이전에 비판받은 ‘맥베스 부인’처럼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먼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교향곡 4번’이 세상에 나가면 그와 그의 가족은 ‘사라질’ 위기에 처할 것이다.

▲ 겨울 궁전 앞 광장의 모습. 1905년 1월 9일 분노한 사람들은 이곳으로 몰려들어 시위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권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기로 했다. 4개월 만에 만들어진 ‘교향곡 제5번’이 그것이다. 이 곡에는 ‘당국의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의적인 답변’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교향곡 5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제시하는 대로 이상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곡의 처음은 비극적인 첼로 소리로 시작하고, 뒤뚱거리는 2악장을 지나 비극적인 멜로디의 3악장에 다다른다. 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라 ‘혁명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이나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고통’으로 해석됐다. 4악장이 되면 해가 떠오르는 듯한 강렬한 팀파니 소리가 들리고, 결국 음악은 고통을 이겨내고 희망찬 ‘해피 엔딩’을 맞는다.

여기까지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소련당국의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라 당국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쇼 스타코비치가 ‘맥베스 부인’ 이후로 교화되고 명확한 음악을 작곡했다고 말했다. 재밌는 점은 고통에서 환희로 끝나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의 구성은 당국이 형식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이라고 비판하던 베토벤의 ‘교향곡 5번’과 매우 닮아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명사가 된 이 곡은 결국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멸시하던 형식주의적 구성을 그대로 따라간 곡이었다.

‘교향곡 5번’으로 소련의 인민 작곡가로 떠오른 쇼스타코비치. 1940년 대숙청을 지휘하던 비밀경찰 NKVD의 수장 예조프가 숙청되며 대숙청은 막을 내린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5번’으로 쌓아올린 명성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평화롭게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던 기간은 길지 않았다.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 동쪽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이라고 불리는 독소전의 시작이었다.


글·사진_ 이정혁 기자 coconutchips01@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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