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석 교수에게 묻다]

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에서 약 2달간 진행되던 시위가 무력 진압됐다.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 사건을 우리는 천안문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났다. 최근 홍콩에서 이뤄진 천안문 추모시위가 금지되는 등 천안문 사건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입장은 여전히 강압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천안문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천안문 사건을 중국 공산당을 비난하기 위해 언급한다. ‘무력진압’이라는 천안문 사건의 단면만을 보고 평가하는 것이다. 천안문 사건이 일어난 배경과 전개 등에 대해서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잘 없다. 천안문 사건이란 대체 어떤 사건일까. 천안문 사건을 연구해온 우리대학 중국어문화학과 하남석 교수에게 물어봤다.

천안문 사건, 복잡했던 시대상이 반영되다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던 1980년대는 중국에서 개혁·개방 정책이 이뤄질 때였다. 시장경제체제가 도입됐으며 서구사회와의 교류가 활발히 이뤄졌다. 한편 전 세계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한국과 대만 등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동유럽에서는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반대하는 반체제 운동이 발생했다. 흔히 국내나 서구사회에서는 이런 시대상을 고려해 천안문 사건을 중국 시민사회가 중국 공산당의 독재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요구한 사건이었다고 평가한다. 시장체제 도입과 개방 이후 성장한 시민사회가 정치개혁과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요구한 사건이란 것이다. 그러나 하 교수는 “천안문 사건을 정치이념의 대립으로만 보기에는 훨씬 복잡한 사정이 있다”며 “천안문 사건의 발단과 무력 진압의 배경을 알기 위해선 문화대혁명과 당시 중국 사회를 더 면밀히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어문화학과 중국정치경제전공 하남석 교수(본인제공)
중국어문화학과 중국정치경제전공 하남석 교수(본인제공)

 

시위는 사회 내 쌓인 불만을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는 움직임이다. 당시 중국 사회에서는 어떤 불만이 쌓였으며 또 민중은 어떤 요구를 했을까. 하 교수는 당시 중국 사회 분위기에 대해 “시장경제 도입 이후 대규모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관료층의 부패가 심해졌다”며 “삶이 어려워진 도시주민의 불만이 쌓였고 학생들은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의 정상화를 요구했다”고 설명한다. 한편 노동자들은 개혁·개방 정책 이후 빈부격차가 심해지자 모두가 마오쩌둥 시기가 더 좋았다며 시장화 개혁 이전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개혁·개방 정책으로 변화가 이뤄지던 과도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과도기 속에서도 불만을 표하지 않은 세력이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농촌 농민들의 경우 개방 정책 이후 살기 더 좋아졌다면서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당시 발발한 시위들 역시 중국 각 도시에서 일어나거나 동조했지 농촌과는 먼 이야기였다. 하 교수는 “당시 대자보나 발언, 문헌들을 보면 사람들의 요구는 진영별로 달랐고 심지어 학생 지도부 사이에서도 입장이 갈렸다”며 “천안문 사건을 단순히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요구한 반체제 운동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고 당시 사람들 간 간극을 강조했다.

문화대혁명의 그림자, 무력진압을 불러일으키다

 중국공산당은 왜 반체제 운동도 아니었던 시위를 강경히 진압했던 것일까. 하 교수는 “무력진압의 이면에는 당시 중국 집권층들이 갖고 있던 문화대혁명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면서 “당은 천안문에 모인 군중의 움직임이 제2의 문화대혁명이 될지도 모른다며 걱정했다”고 설명한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 시기에 이념추구와 정쟁 등으로 인해 사회·문화·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 발생한 개혁 운동이다. 그러나 그 정도가 과격했기에 마오쩌둥 사후 중국 공산당조차 문화대혁명이 잘못됐었다고 평가했다. 국내에는 홍위병과 문화재 파괴라는 이미지로 유명한데 문화계뿐만 아니라 중국 정치계 역시 큰 파동을 겪었다. 천안문 사건 당시 집권층들 역시 학생, 노동자, 농민 계층으로부터 문화대혁명 때 자본주의를 따르는 무리로 몰려 실각되고 비판받은 경험이 있다.

덩샤오핑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경우 자아비판 문서를 제출하고 그를 반대하는 마오주의자들에게 비난당하는 등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하 교수는 “천안문에 학생과 민중이 모이고 진보 지식인과 당 내부 개혁파들까지 동조하는 분위기가 있자 당 내부에서 위기감이 더 커졌다”며 “문화대혁명 같은 혼란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크게 경계한 지도층이 결국 계엄령까지 선포해 무력진압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천안문 사건의 무력진압에는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의 방중도 영향을 미쳤다. 1989년 5월 15일에 이뤄진 고르바초프의 방중은 중국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스탈린 사후 중국과 소련의 사이가 악화된 상황에서 30년 만에 소련 지도자가 중국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시위대에게 고르바초프의 의전행사를 위해 천안문 광장에서 잠시 철수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당의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고르바초프를 위한 의전행사는 상당히 간소화됐다. 하 교수는 “중국 같은 공산국가는 의전행사를 굉장히 중시한다”며 “고르바초프 같은 중요한 국빈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하자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이 큰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강요되는 침묵과 남은 이들의 목소리

현재 중국 당국은 천안문 사건과 관련된 언급을 금지하고 있다. 천안문을 추모하는 시위는 당연히 중국 본토에서 금지된 상황이다. 매년 열리던 홍콩에서의 시위 역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를 이유로 금지됐다. 중국 사람들은 ‘6489’라는 숫자나 ‘5월 35일’ 같은 표현을 이용해 천안문을 추모하거나 관련 정보를 검색하려 하지만 당국은 이조차 금지한다. 당시 생존자도 남아있고 사건 당시를 목격한 사람들도 많은데 왜 이렇게까지 침묵을 강요하는 것일까.

하남석 교수는 “중국 공산당은 무엇보다 안정을 중시하며 ‘부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산당의 안정적 통치가 가장 먼저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대규모 혼란이 다신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언급조차 금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하 교수는 “누군가 천안문 사건에 관해 언급하면 억압함으로써 천안문 사건의 최후가 어땠는지를 상기시키고 있다”며 “이런 방법을 통해 천안문 사건과 유사한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덧붙였다. 침묵을 강요함으로써 천안문 사건을 망각으로 밀어 넣고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의 입도 막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당국이 그때 있던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고 행동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하 교수는 “당시 학생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우얼카이시나 왕단의 경우 미국 등 서구권으로 망명한 이후 지금도 반중국시위에 종종 모습을 보이고 있고 천안문 사건에 동참했던 진보 지식인 류샤오보는 중국 내에서 계속 자유주의 운동을 펼치다 죽었다”고 설명했다. 이 중 왕단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은 지난 2일 미국 국무부를 방문해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을 만났다. 류샤오보는 중국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학생과 지식인 외 노동계 인사들 역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하 교수는 “천안문 사건 당시 노동자들은 사형을 선고받는 등 짧은 구금 후 망명을 간 학생들보다 훨씬 가혹하게 처벌받았다”면서도 “일부 인사들은 홍콩으로 망명을 가 지금도 중국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돕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의 중국이 내린 평가와 앞으로의 중국이 내릴 평가는

천안문 사건이 전개 중이던 1989년 4월, 중국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시위를 규탄하는 사설을 내 ‘반혁명동란’으로 규정했다. 이때 반혁명은 곧 반체제, 중국 공산당에 반대했다는 뜻이다. 이 평가는 지금도 수정되지 않고 있다. 지금 중국 내에서는 천안문 사건에 대해 모르거나 알아도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 유학생에게 천안문 사건의 사진을 보여주자 ‘한국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사진이 아니냐’고 답변했다는 일화는 상당히 유명하다. 현재 중국인들의 천안문 사건에 대한 인식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신세대인 링링허우(零零後) 등 부강한 중국만을 본 세대는 또 다른 평가를 내린다. 하 교수는 “요즘 젊은 세대 중에서는 천안문 사건을 ‘중국의 발전상에서 있던 아픔’으로 인식하고 ‘그 희생을 딛고 중국은 성장을 이룩했고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안정을 이뤘다. 그러니 다시 이런 혼란이 있어선 안 된다’는 정도의 인상을 갖거나 ‘서양 세력의 공작’이라고 주장한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중국 내 천안문 사건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될까. 지난 2015년 천안문 사건의 발단이 된 후야오방이 복권되며 천안문 사건 역시 중국 내에서 재평가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홍콩에서의 천안문 사건 추모 시위에도 금지 조치가 내려지는 등 중국은 천안문 사건에 오히려 더 억압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하남석 교수는 “사실 후야오방의 경우 그의 죽음이 천안문 사건의 발단이 됐던 것이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며 “시위대에게 호의적 태도를 보이다가 천안문 사건 이후 실각됐던 자오쯔양이 복권되지 않는 점, 홍콩 국가보안법 등 시진핑 정권의 강압적 태도를 보아 아직 중국 내 천안문 사건의 재평가가 이뤄지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밝혔다. 80년대 과도기에 등장한 다양한 목소리를 품었던 1989년 천안문. 천안문 사건의 중국 내 재평가는 아직 먼 이야기인 듯하다.


이길훈 기자 greg0306@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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