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경선과 남북 분단 상황, 이념의 대립 등 현대 대한민국의 많은 부분이 6.25 전쟁을 거치며 만들어졌다. 6·25전쟁을 언급할 때 가장 주목받고 강조되는 부분은 전쟁의 원인이다. 국내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6월 25일을 중시해 매해 기념하며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음을 강조한다. 전쟁의 책임이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에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학계에서는 전쟁의 원인에 관해 각종 학설과 주장이 쏟아져 나온다.

반면 전쟁의 마무리인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하 휴전 협정)에 관한 관심도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전쟁이 발생한 날은 국내에서 사용되는 전쟁의 명칭에서부터 강조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전쟁의 발생과정 역시 여러 학설이 있지만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휴전 협정이 언젠지,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누가 서명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적다. 휴전 협정 전에 어떤 논의가 이뤄졌는지 역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임에도 관심이 떨어진다. 사실 난이도만 보자면 휴전이 개전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국제정세에 따른 북한, 중국, 소련 3국 공산진영의 공조만으로 이뤄졌던 개전과 달리 휴전은 공산진영과 유엔군 측 모두의 합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 휴전 협정에 서명하는 마크 클라크 전 유엔군 총사령관의 모습(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
▲ 휴전 협정에 서명하는 마크 클라크 전 유엔군 총사령관의 모습(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

1951년 7월, 유엔군 측과 공산진영은 개성에서 첫 정전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양측은 휴전을 위해 합의해야 할 사항들을 정했다. 그러나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유엔군과 공산진영은 두 가지 큰 쟁점을 두고 난항을 겪었다. 하나는 국경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양 진영의 포로를 교환하는 문제였다. 휴전 협정은 1953년 7월 27일에야 이뤄졌다. 두 쟁점을 모두 해결하고 휴전 협정을 맺기까지 2년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38선을 둔 충돌, 군사분계선은 어디인가

전쟁 이전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분할됐었다. 그러나 남침 이후 전선이 움직이는 과정에서 양측이 점령한 지역은 더 이상 38선에 따른 분할과 일치하지 않게 됐다. 따라서 휴전 협상을 맺기 전 군사분계선을 새롭게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군사분계선이란 휴전 후 양측의 영역을 군사적으로 나누는 경계선을 말한다. 흔히 휴전선이라고도 부른다. 이때 공산진영은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자는 입장을 내세웠다. 이는 정전회담을 앞두고 공산진영에서 미리 공조한 내용이었다. 공산진영은 정전회담이 이뤄지기 전인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주유엔대사 말리크의 연설을 통해서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자는 주장을 공표했다.

그러나 유엔군 측은 이를 거부했다. 38선을 먼저 넘은 것은 북한이며 그동안 양국 병력이 38선을 넘나든 횟수만 4번이니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주장이었다. 이 같은 유엔군의 강경한 반응에 마오쩌둥은 38선을 양보하지 않으면 휴전 협상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할 것이라며 38선 문제를 양보하자는 주장을 스탈린에게 전달했다. 이때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입장을 함께 전달했는데 김일성은 회담이 깨지는 것보단 38선 문제를 양보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었다. 빠른 휴전을 바라던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38선 문제를 양보할 생각까지 갖고 있었던 것이다. 둘과 달리 전쟁의 장기화를 바랐던 스탈린은 처음에는 38선 문제는 양보할 수 없다며 마오쩌둥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후 스탈린은 서울 공격의 요충지인 개성이 북한 측 영토에 포함되는 것을 조건으로 제안을 수용했다. 빠른 휴전을 위해 서둘러 유엔과 합의할 것을 원하던 중국과 북한의 입장을 계속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공산진영이 유엔군 측의 제안을 받아들임에 따라 1951년 11월 27일, 양측은 38선이 아닌 당시 군사접촉선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남북 양 2km, 총 4km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는 것도 함께 합의됐다. 이러한 합의로 38선 논쟁은 끝났지만 국경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한 가지 항목이 덧붙여졌기 때문이다. 합의한 후 30일 이내에 군사 휴전 협의에 서명하지 않으면 이후 전선의 변화에 따라 군사분계선 위치가 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합의 후 양측은 2년 후에야 휴전 협의에 서명했다. 때문에 그동안 양측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얻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계속 벌였다. 전쟁 초기처럼 전선이 급격히 변하는 일은 없었지만 약 1년 8개월 후 체결된 휴전 협정 전까지 전투는 지속됐다.

포로 송환 문제, 전원송환과 자원송환의 대립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유명한 장면이 있다. 6·25전쟁에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힌 주인공 이명준에게 인민군 장교가 북한에 돌아올 것을 설득하는 장면이다. 장교의 연이은 설득에도 중립국에 갈 것을 고수하는 명준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들에게 기억된다. 소설 속 명준이 겪은 것처럼 6·25전쟁 후 포로들이 어디로 갈 지 직접 결정하는 방식은 유엔군에서 주장한 ‘자원송환원칙’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정해지기 전까지 공산진영과 유엔군 양측 간에 오랜 갈등이 있었다. 공산진영은 포로의 국적에 따라 자동으로 해당 국가로 송환되는 ‘전원송환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6·25전쟁 발발 직전 해인 1949년에 제정된 ‘제네바협약’에 따르면 전쟁 중 발생한 포로는 본국으로 송환하게 돼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이 자원송환원칙을 주장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제2차 세계대전 중 포로로 잡혀 있다가 소련으로 송환된 군인들을 스탈린이 숙청했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의 최고 지도자였던 스탈린은 송환된 포로들에게 스파이 혐의를 덮어씌워 대부분 숙청했었다. 미국은 이 같은 일이 재발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 당시 냉전 속 1세계와 2세계의 체제경쟁 때문이었다. 공산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한국에 남거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면 공산세계와의 체제 경쟁에서 자유세계의 우위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될 것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휴전 협상과정에서 유엔군은 자원송환원칙을 고수했다.

공산 진영의 역시 포로 송환 문제는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여기에는 입장 차이를 이용해 전쟁을 장기화하려는 스탈린의 의도가 있었다. 실제로 1953년 3월 5일 스탈린 사후 포로송환 문제는 급속도로 진전됐다. 공산진영의 입장이 유엔군 측의 입장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1953년 6월 8일, 양측은 자원송환원칙에 따라 ‘포로 송환 협정’을 맺어 귀국을 원하는 포로는 휴전 후 60일 내에 송환하기로 했다. 이 때 송환 희망자의 경우 판문점에서 바로 조국으로 돌아가게끔 했다.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의 경우 중립국송환위원회로 이관됐다. 여기서 남북 대표들은 포로들의 자국 송환을 권유했는데 이것이 앞서 말한 『광장』 속 장면의 배경이다.

유엔군과는 달랐던 한국의 입장

한편 공산진영에서 북한, 중국, 소련의 입장이 달랐던 것처럼 자유진영에서도 의견 차이가 있었다. 휴전에 관해 한국은 유엔군 측과 다른 입장을 내비췄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하 이승만)은 줄곧 휴전에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주장은 국민들에게 높은 지지를 받았다. 전국 곳곳에서 ‘통일 없는 휴전’은 반대한다는 시위가 발생했다. 이러한 한국의 입장은 1953년까지도 변함없었다. 이승만은 “유엔군이 돕지 않는다면 한국군만이라도 북진하겠다”는 등 강경한 입장을 내비췄다.

이러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 측의 의견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오히려 휴전 협정 과정에서 한국은 철저히 배제됐다. 이로 인해 쌓인 불만은 ‘반공포로 석방사건’으로 이어졌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국내 각지의 수용소에 수감된 약 2만 7천명의 반공포로들을 일시에 석방했다. 유엔군과도 의논하지 않은 행동으로 포로 송환 협상을 마친지 1주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협상과 다른 움직임은 당연히 공산진영의 거센 반발을 샀다. 유엔군 역시 당황하며 이승만에게 반감을 품었다. 미군은 라디오 방송을 활용하는 등 석방된 반공포로들을 재수용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국 국민들이 석방된 반공포로들을 돕는 분위기 속에서 큰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반공포로 석방사건은 국제사회에 한국의 협조가 없다면 휴전이 어렵다는 점을 깨닫게 만들었다. 한국이 휴전에 실질적인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결국 미국이 이승만이 줄곧 요구하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보장하고 경제 원조 등을 약속한 후에야 한국은 휴전 문제에서 한발 물러섰다. 이렇듯 여러 쟁점에 대한 각 진영의 입장 차이를 좁히는 2년간의 힘겨운 과정 끝에야 휴전 협정이 성사될 수 있었다.


이길훈 기자 greg0306@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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