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노천명 시인의 「사슴」 중 한 구절이다. 사슴이 슬픈지는 알 수 없다. 근데 왜 시인은 사슴이 슬프다고 생각했을까.

조동일 선생에 따르면 문학 장르는 네 가지로 갈라진다. 서정, 서사, 극, 교술. 그 중 서정은 ‘세계의 자아화’다. 세계는 사슴이다. 사슴은 대상이라 할 수 있고 그 대상은 나를 만나 재구성된다. 재구성되는 과정이 바로 자아화다. 대상은 객관으로 존재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선 대상은 대상이다. 우리에게 포착되기 이전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포착되는 순간 그 대상에는 일종의 시선이 입혀진다. 그래서 ‘시’라는 것은 대상과 시인 간 교감의 표현이다. 다만 그 대상에 대한 정의는 오롯이 시인의 것이 아니다. 여기엔 독자의 시선도 개입한다. 노천명 시인이 아무리 사슴은 모가지가 길어 슬프다고 외쳐도 독자가 “사슴은 모가지가 긴 덕에 스탠딩석에서 가수를 잘 볼 수 있지 않은가?”라고 말한다면 그 대상은 또 다른 속성을 얻는 것이다. 서정은 세계의 자아화일 수는 있어도 그 세계를 자아화한 결과에 모두가 동의할 수는 없다.

기사는 문학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의 자아화 과정을 필수적으로 겪는다. 기자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만 기사엔 자아화 과정이 드러나선 안 된다. 세계를 자아화해 기자 나름의 주관이 생겼을 때도 그 주관을 본인의 입으로 전할 수 없다. 모가지가 긴 사슴이 참 슬퍼보여도 일단은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200명 정도면 적당하다. 이 사슴이 어때보이나요? 1. 기쁨. 2. 슬픔. 3. 괴로움. 4. 즐거움. 5. 기타. 그 중 기쁨이라고 답한 사람과 슬픔이라고 답한 사람에게 인터뷰를 하면 금상첨화다. ‘왜 기쁘다고 생각하시나요?’, ‘모가지가 긴 짐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후에 기자는 그것을 최대한 객관화해 전달한다. 이러한 노력을 거쳐도 이미 세계가 자아화된 상태에서 대상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할 때 중요시해야 할 자세다.

사슴이 슬퍼보인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기사를 보면서도 독자들은 각기 다른 생각을 할 것이다. 이때 기사는 마치 포착되기 전의 사슴처럼 최대한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독자 개개인의 자아화가 보장된다. 세계의 자아화 과정에 섣부르게 개입해선 안 된다. 기자는 세계를 자아화했음에도 그것을 표출할 수 없으며 독자에겐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줘야 하는 사명을 가졌다. 노천명 시인이 사슴의 모가지가 길어 슬퍼보인다고 한 이유는 본인이 슬펐기 때문이다. 기자는 모가지가 긴 사슴을 보며 기뻐보인다는 생각이 들어도 우선 그 사슴의 사진을 찍고 사슴을 목격한 시간대를 적어야 한다. 그것이 기자의 책임이다.

김우진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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