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광복절 경축식 당시 김원웅 광복회장의 기념사가 연일 화제다. 김 광복회장이 이승만 전 대통령 등의 친일 행적을 거론하며 ‘친일 청산’을 화두로 던진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은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됐고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보수 야당인 당시 미래통합당은 “국민 편 가르기 하는 경축사에 유감”이라며 반발했다. 김 광복회장의 친일 청산 강조는 24일 기자회견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의 친일 행적 증거를 제시하며 국가를 교체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 발언 또한 야당으로 하여금 “정치생명 연장을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친일 청산은 광복 이후 이승만 정부, 문민정부, 참여정부 등 정치권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돼왔다. 그러나 광복을 맞이한 지 75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한 친일 청산을 이루지 못한 채 또 다시 친일 청산을 언급해야 하는 것일까.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친일 청산을 위한 노력과 실패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현재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모색해보자.

▲ 이승만 정권과 유신 정권 시기에 친일파에게 준 훈장은 모두 368건으로 집계됐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 전체 친일파 서훈의 84%를 차지한 것으로 분석됐다.
▲ 이승만 정권과 유신 정권 시기에 친일파에게 준 훈장은 모두 368건으로 집계됐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 전체 친일파 서훈의 84%를 차지한 것으로 분석됐다.

국민의 염원이 담긴 반민특위 출범

친일 청산의 역사를 거론할 때 흔히들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단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일 것이다. 반민특위는 1948년 제헌헌법이 공포 당시 101조 ‘반민족행위 처벌법 제정’에 의거해 10월 12일 출범한 위원회다. 새로운 나라의 출범과 함께 합법적으로 국가기관에서 친일파를 청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보다 확실한 친일파 재판을 위해 특별 재판부, 특별 검찰부, 특별 경찰대도 따로 조직됐다. 당시 반민특위의 권력은 상당히 강력했는데 이는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민의 염원이 강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반민특위의 검거 1호는 조선시대 제1의 실업가였던 박흥식으로 전해진다. 화신백화점의 소유자였던 박흥식은 전형적인 식민지 기업가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감사도 역임했다. 부와 권력 때문에 일제에 전쟁 물자를 기부한 반민족 행위자였던 것이다. 박흥식 외에도 대다수의 반민족 행위자들은 기존의 직위를 유지한 경우가 많았기에 국민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반민특위에 검거된 친일 경찰로 유명한 노덕술의 경우 독립의 열망이 뜨겁던 시기인 1920년경에 일본 편에 선 것으로 전해진다. 변절한 독립 운동가이자 예술가로도 유명한 최남선과 이광수 등도 반민특위 검거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보내기 위해 문학적 재능을 악용했다.

친일파에는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친일파는 중앙 사무국에서 처리했으며 각 지역의 친일파는 9개 도 조사부에서 처리했다. 악질 친일파의 경우 사실 반민특위 출범 이전부터 이미 ‘친일파군상’이라는 명단에 명명됐다. 또한 전국 단위로 친일파 고발 접수를 받기도 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반민특위 와해를 지시하다

사실 반민특위는 출범 전부터 반대세력에 맞서야 했다. 1948년 9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 대규모 집회가 개최됐는데 시위대는 친일파를 척결하고자 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듬해 1월 25일에는 반민특위 요인 암살 모의가 발각되기도 했다. 반민특위 간부 15명을 38선까지 유인해 살해한 뒤 이들이 월북을 시도해 사살했다고 위장하려는 음모였던 것이다. 암살 모의 사건의 진행자금은 박흥식이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1949년 6월 6일 35명 반민특위 습격 사건으로 반민특위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주동자는 서울 중부서장 윤기병이었으며 검거된 반민족행위자 688명 중 3분의 1 이상이 경찰이었다. 척결 대상이 제일 큰 무력을 가진 것 자체가 큰 비극인 사건이었다. 이후에도 반민특위 습격 사건은 전국에서 크고 작게 벌어졌다. 지방 반민특위의 경우 전화선이 절단되고 사무실이 봉쇄되기도 했다.

이러한 반민특위 방해 공작의 배후는 과연 누구였을까. 이는 놀랍게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으로 밝혀졌다. 1949년 6월 8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내가 직접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게 명령했다”며 “행정부만이 경찰권을 가지는 것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는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에 어긋난다고 주장한 것이며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반민특위 권한을 전면 부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반민특위가 와해되기 전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찾아간 이 전 대통령은 조사 중단을 지시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의 아들 김정육 씨는 “이 박사가 아버지에게 반민특위 위원장 대신 다른 자리를 제안하면서 이와 관련한 협상이 오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더 나아가 이 전 대통령은 친일 경찰 노덕술을 비호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전 대통령은 노덕술에 대해 “노덕술 등이 공산당을 잡는 기술자며 그들을 처단하려는 것은 공산당의 짓”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노덕술을 이용해 반공 정책을 강화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군대가 흔들렸고 주한미군은 철수해 위기를 맞았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와해시켜 친일 경찰이라는 자기 세력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평생의 정적이자 남북협상에 찬성했던 소장파 김구의 지지 세력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대학 국제관계학과 김민정 교수는 프랑스의 비시 정권과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권을 비교하며 “프랑스는 기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부역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고 비시 정권에서 한 일들이 친독정책이 명백했고 자발적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발굴, 처벌이 비교적 간단하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우 “41년의 세월이라는 장구한 세월에서 어디까지를 친일 부역으로 봐야할 지에 대한 기준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제6공화국 수립 이후의 친일 청산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의 야욕에 의해 와해됐으나 친일파 척결을 위한 노력은 제6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계속됐다. 우리 민족의 아픔과 치욕을 고스란히 담은 상징물이자 마치 목에 걸린 가시와도 같았던 조선총독부가 광복 50주년인 1995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철거된 것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라져야 할 유산이었다. 당시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의 잔해 중 첨탑을 포함한 일부는 현재 독립기념관 한편의 공원에서 대한민국의 해방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남아 전시되고 있다. 또한 과거사 청산과 함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의 일환으로 일제의 흔적이었던 ‘국민학교’라는 명칭도 ‘초등학교’로 변경됐다.

이후 2005년 참여정부로 접어든 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하 친일파 재산환수법)’이 제정됐다. 친일행위로 축재한 재산의 국가귀속에 대한 법률이다. 2006년 서울고등검찰청과 수원지방검찰청은 이 친일파 재산환수법에 의거해 친일파 후손 소유의 부동산을 환수하기 위해 관련 부동산 처분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기도 했다. 친일파의 후손들은 대부분 재산 환수에 불복하고 행정소송 및 헌법소원을 제기했으나 대부분 패소 및 각하됐다.

과거사를 대하는 남아공의 자세

해방 후 75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친일 청산을 위한 목소리가 있다는 것은 친일의 흔적을 완전히 뿌리 뽑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대한민국과 유사한 과거사를 지닌 다른 나라의 행보는 어떠할까. 김민정 교수는 “역사적 성찰을 잘 이뤄낸 사례를 떠올릴 때 많은 학자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을 언급한다”며 “넬슨 만델라의 투쟁과 용서와 화합의 정책들은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인종차별정책이 폐지될 즈음 흑인 정권이 등장할 경우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한 백인들에게 만델라는 집권 뒤 과거사 문제에서 ‘잊지는 않지만 용서한다(Forgive without forgetting)’는 원칙을 내걸었다. 그는 남아공을 위해 백인들의 지식·기술과 관료체계와 자본을 통합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그의 태도에 대해서 흑인들이 크게 반발하며 그를 비판했지만 그는 백인 세력을 끌어안고 나가야한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를 통해서 진실을 규명하지만 용서하는 방식으로 과거를 잊지 않지만 통합을 유지하면서 남아공을 지키려는 정책을 택한 것이다.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은 불완전한 친일 청산으로 인해 75년째 광복이 완성되지 못했다. 과거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하고 밝히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나 처벌이 궁극적인 목적이 돼선 안 된다. 후대에 대한 민족적 자긍심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국 사회의 나아갈 바에 대한 모색을 목적으로 삼아 좀 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진실을 밝히는데 초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허인영 기자 inyoung321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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