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 유어 달링’. 그대로 해석하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라’는 잔인한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글을 쓸 때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라는 의미로 작가들이 쓰는 관용구이기도 하다. 영화 <킬 유어 달링>은 1950년대 미국의 새로운 문학 운동을 이끌었던 ‘비트 세대’ 작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쩌면 작품 안에서 해방을 추구했던 이들과 영화의 제목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 앨런과 루시엔은 각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외면하고 죽이게 된다.

기존의 형식적인 문학에 싫증을 느끼던 앨런은 대학교에서 루시엔을 만난다.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루시엔에게 앨런은 순식간에 빠져든다. 둘은 문학 혁명을 준비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루시엔의 곁에는 항상 데이빗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데이빗의 정체를 의심하는 앨런에게 루시엔은 자신의 스토커라 설명한다.

앨런과의 충동적이었던 키스 이후 혼란스러움에 도망치려던 루시엔은 출발 직전 데이빗에게 붙잡힌다. 데이빗은 루시엔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루시엔은 칼로 데이빗을 찔러 죽이고 만다. 감옥에 갇힌 루시엔은 앨런에게 변호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앨런은 루시엔의 소지품 속에서 데이빗과 루시엔이 어렸을 적 함께 찍은 사진 뒷면에 써 있는 ‘완벽한 날’이라는 글귀를 발견하게 된다. 앨런은 결국 루시엔의 부탁을 외면한다.

루시엔은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끊임없이 부정한다. 데이빗을 스토커라고 표현하며 혐오한다. 그러나 데이빗과 루시엔이 주고받던 미묘한 감정과 눈빛은 데이빗의 사랑이 일방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한편 앨런은 루시엔을 향한 사랑을 숨기지 않는다. 키스 이후 루시엔이 자신을 피하자 괴로워하며 루시엔을 닮은 다른 남자와 호텔로 들어가기도 한다.

루시엔은 데이빗을 사랑했으나 칼로 찔렀고 앨런은 루시엔을 사랑했으나 감옥에서 꺼내 주지 않았다. 이들의 모순적인 행동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잊기 위함인지 아니면 금기시되던 감정을 갖게 한 존재에 대한 복수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이고 외면했던 행동과는 반대로 그들의 ‘달링’은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게 됐다는 점이다.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도 저절로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의 반증일 뿐이다. 영화 또한 이들의 탁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김유경 기자 candy8867@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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