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포포는 요새 알 수 없는 일투성이다. 여느 날처럼 집을 나선 아빠는 몇 밤을 자도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부쩍 눈물이 많다. ‘나더러는 울지 말라고 화내더니’ 포포는 괜히 심술이 났다. 아빠에 대해 형한테 물어봐도 형은 조용히 포포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다. 어느 날 해가 밝기도 전에 누군가 문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형이었다. ‘나한텐 집에만 있어야 한다고 해놓고서!’ 형도 치사하다. 포포는 몰래 형을 따라갔다. 형은 친구들과 만나 전쟁놀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작은 성벽도 쌓았다. ‘나도 끼워 달라 해야지!’ 그 순간,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경찰! 경찰이 온다! 다들 도망쳐!” 삽시간에 흩어지는 군중 속에서 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포포?” 어스름이 밝아오는 아침, 닭 우는 소리를 총성이 덮었다.
 

세 번의 쿠데타, 53년간 이어진 미얀마의 밤

위 이야기는 현재 미얀마가 직면한 사태를 재구성한 가상의 이야기다. 지난해 11월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이하 NLD)은 총선에서 군부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총선의 결과로 미얀마 의회 전체 의석 중 과반인 62.4%가 NLD 인사로 구성됐다. 2015년 선거를 통해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던 NLD는 독자적으로 정부를 구성할 권리를 얻었고 군부의 힘을 약화하기 위한 개헌을 추진했다. 의회 전체 의석수의 25%를 군부에 할당하는 조항과 각 주요 부처의 수장을 군부가 선임하는 조항 등을 삭제해 나간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지난 2월 1일 기득권을 뺏길 것을 경계한 군부는 총선 결과에 불복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과 여권의 주요 인사들을 구금했다. 그들은 지난해 치른 총선을 부정선거라 주장하며 군부 주도하에 재선거를 실시할 것을 공표했다.

미얀마 역사상 군부 쿠데타는 이번이 세 번째다. 지난 1962년 ‘네윈’ 군부는 쿠데타를 통해 미얀마를 장악했다. 크고 작은 민주화 시위가 있었지만 군부를 몰아내지는 못했다. 1988년 시민사회는 ‘8888 항쟁’으로 불리는 대규모 반독재 시위를 일으켰으나 민주주의 대신 찾아온 것은 두 번째 쿠데타였다. 당시 국방장관 ‘소몽’을 앞세운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차지했다.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한 후 신군부는 사회 혼란을 막고 국가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집권을 이어갔다.

사이버한국외대 베트남인도네시아학부 장준영 교수는 서울대 아시아 연구소의 『아시안 브리프』에서 “미얀마의 군부는 그들이 국론분열을 막고 사회 안정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임을 자처해왔다”고 지적했다. 소수민족 갈등과 반군 등의 문제로 불안정한 미얀마의 현실을 군부가 이용해왔다는 의미다. 1962년 쿠데타로 시작된 군부의 통치는 2015년 아웅산 수치를 필두로 문민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53년간 지속됐다. 다만 문민정부의 출범이 군부의 청산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장 교수는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도 정치·경제적 기득권은 유지됐다”고 밝혔다. 그러한 배경에서 불안하게 유지되던 미얀마의 민주주의는 결국 지난 2월 1일 세 번째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시민의 노랫소리가 총성에 묻히다

군부에 대항하며 시민들은 수도인 네피도와 최대 도시 양곤을 위시해 곳곳에서 민주항쟁을 전개했다. 항쟁은 시민 불복종 운동 형태로 구체화됐다. 시민들은 투쟁의 상징인 ‘세 손가락’을 내밀며 부당한 권력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현지에서 적극적으로 시위에 임하고 있는 A(23) 씨는 “우리 시민들은 자유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함께 세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군부에 저항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학생인 A씨를 포함해 이번 항쟁은 ‘MZ세대’의 젊은 청년들이 주도하고 있다. 10~30대로 구성된 MZ세대 청년들은 SNS를 통해 현장감 있는 사진과 동영상, 공감을 끌어내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외국 단체 및 개인과의 연대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덕성여대 국제통상학과 박현용 교수는 이번 항쟁에 관해 “과거 두 차례의 시위에 비해 시위 방식과 메시지, 규모가 매우 다양하다”고 분석했다. 그는 미얀마의 이번 항쟁이 이전의 항쟁들에 비해 세계로부터 큰 관심을 끌며 군부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군부는 시민항쟁에 철저히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지침을 고수했다. 그 같은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해 세계 각국과 단체들이 일제히 군부를 비판해 왔지만 군부는 무시로 일관했다. 군부는 오히려 국제사회의 비난 속에서 축배를 들었다. 지난 27일 국군의 날 행사에 중국과 러시아 등 8개국의 대표단을 초청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화려한 열병식을 거행한 당일 살해된 미얀마 국민의 수는 114명에 육박했다. 박 교수는 “군부는 물리적인 군사력과 경찰력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라며 “앞으로도 시민들의 희생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를 표했다.

군부의 억압은 무력진압에 그치지 않았다. A씨는 “군부가 모바일 데이터를 차단한 데 이어 와이파이까지 차단했다”고 호소했다. 일찍이 공영방송과 TV를 장악한 군부가 SNS를 의식해 데이터와 무선인터넷까지 통제한 것이다. 박 교수는 “군부가 휴대폰 데이터와 와이파이를 차단하면서 시위에는 큰 타격이 가해졌다”고 진단했다. MZ세대를 중심으로 구성된 시위대는 SNS를 기반으로 조직을 구성하고 항쟁을 이끌어왔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에 시위 소식을 전달하기 어려워진 만큼 미얀마 시민들이 세계에서 고립될 여지가 커진 점도 불안을 낳고 있다.
 

묘연한 국제사회 개입과 고립되는 시민들

국제사회에선 군부가 강력한 힘으로 인권 유린을 지속하는 이상 미얀마 내부의 움직임만으로는 저항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미국과 영국 등 일부 국가는 미얀마 군부의 잔혹한 행태에 맞서 군부를 향한 표적제재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그러한 제재가 군부에 큰 타격이 없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박 교수는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 아세안의 영향력이 전체 교역규모의 70%에 달한다”며 “영국과 미국, 혹은 일본까지 표적제재를 실시하더라도 군부입장에서 견디지 못할 수준의 제재는 이뤄지기 어렵다”고 밝혔다. 

국제연합(UN)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주장 역시 계속 제기되고 있다. 보호책임원칙(이하 R2P)이 화두로 떠올랐다. R2P는 치안과 안보 붕괴로 자국민을 보호할 능력을 잃은 국가나 독재국가에서 국민에 대해 심각한 인권침해가 이뤄지는 경우 국제사회의 인도주의적 개입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다만 R2P의 발효가 현실성이 있는가에 관해선 의문이 뒤따른다. 지난 31일 미얀마 R2P와 관련해 UN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 긴급회의가 열렸지만 회의는 별다른 수확 없이 끝났다. 박 교수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의 의견일치가 이뤄지지 않아 개입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짚었다. R2P를 위해서는 상임이사국 5개국의 만장일치가 필요한데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미얀마 사태에 관해 미온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만큼 R2P를 통한 국제사회의 직접개입은 묘연할 전망이다. 

한편 군부에 의해 축출된 미얀마 민주 진영의 인사들은 연방의회 대표위원회(이하 CRPH)를 구성해 군부에 대항하는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CRPH의 일원인 ‘사사’는 KBS <시사기획 창>·<사사건건>과의 인터뷰에서 “CRPH는 2020 총선의 정당성을 바탕으로 유엔과 국제사회에서 미얀마 의회를 대표하기 위해 구성됐다”며 “국제사회의 관심과 도움을 간절히 요청드린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CRPH의 행보가 사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박 교수는 “CRPH가 소수민족과 연방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고 무력투쟁을 이어간다면 국제사회의 인도적 개입과 정치적 중재가 이뤄지고 선거 혹은 중재로 미얀마의 민주주의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민주주의 향한 시민들의 한 걸음

미얀마 시민들의 소망은 군부로부터의 해방과 건전한 민주주의의 도래다. A씨는 “우린 연방 민주주의를 원한다”며 “언젠가 민족과 출신에 상관없이 모두가 자유로이 권리를 보장받고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고 전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미얀마의 모습은 과거 우리나라 군부독재와 민주항쟁의 역사를 떠오르게한다.

전문가들은 현실적으로 미얀마의 상황이 밝지 않다고 말한다. 군부가 강대한 만큼 내부적인 해결을 모색하기 어렵고 외부 개입은 국제정치의 여파로 지지부진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봄이 침묵의 봄으로 끝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설령 당장의 항쟁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그것이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진 않는다. 우리대학 국사학과 염인호 교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광주 민주화 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모든 시위에서 저항의식을 고취시키며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며 “부당한 권력과 맞서 싸우는 데 있어 의미 없는 한 보는 없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미얀마 시민들은 먼 길을 향해 힘겹게 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여 미얀마의 미래가 찬란한 민주주의로 나아가기를 바라본다.


김대훈 기자 daehoon0523@uos.ac.kr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