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우(국관 18)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는 “강자(强者)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강자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법을 만들고 이를 준수하는 것을 정의로 포장한다는 것이다. 입법권자와 행정부 수장을 투표로 선출할 뿐만 아니라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탄핵하기도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 원리가 정착된 시민사회가 아닌 국제정치 영역에서는 어떨까? 얼마 전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와 자국민 학살 소식이 연이어 보도됐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자국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집 안에 있던 미성년자까지 살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얀마 군부를 규탄하는 성명을 내는 것에 그쳤다. 최근 아프가니스탄의 사례는 어떤가? 교조주의적 테러 집단으로 성장한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장악하고 탈레반 반대 세력, 여성, 비이슬람교도를 탄압하기 시작했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제지하지 못하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나치의 집단학살(genocide)에 대한 반성으로 창설된 각종 국제기구와 협약 등이 유효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제법의 기능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국제법 무용론(無用論)은 이미 오래전부터 주장됐다. 현실주의 국제 정치학에서는 한스 모겐소와 케네스 월츠를 필두로 국제법의 기능에 회의를 표했다. 반면 ‘힘’ 즉,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이 국제법을 위반하더라도 처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소국에게는 강대국의 목소리가 반영된 국제법 준수가 강요된다고 본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국제법 발전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제국주의 시기 국제법은 서구 문명의 식민지 건설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도구로 이용됐다. 주권 중심의 국제법 개념에 익숙하지 않았던 동양 국가는 서구 열강의 침략과 개항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조선에 강요했던 ‘최혜국 대우’, ‘치외법권’ 등의 불평등 조항은 앞서 미국과 체결한 조약에서 학습한 것이었다. 

대표적인 국제재판기관인 국제사법재판소(ICJ)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당사국의 동의를 요구하는 재판관할권의 문제 때문에 분쟁이 존재하더라도 재판을 진행하기 어렵다. 재판부의 판결을 받는다고 해도 이행의 문제가 남는다. 국내법에서는 국가가 강제집행절차 등을 통해 이행을 강제할 수 있지만 국제사회에서는 강제력을 가진 상위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이행을 거부하는 국가가 강대국이라면 ICJ의 판결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국제법 자체를 부정하거나 경시할 수는 없다. 강대국과 약소국을 막론하고 현대 국제질서에서 국가 행위의 정당성은 국제법을 통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비록 개별 국가의 인권침해 사태에도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등 국제법의 한계가 쉽게 목격되지만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가 간 분쟁 사안에서는 국제법적 정당성을 지닌 국가의 주장이 매우 강력한 설득력을 얻는다.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무역분쟁, 위안부 배상 문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 등을 보더라도 단순히 군사력이나 경제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 매우 많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외교적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국민감정과 도덕률에 호소하기 이전의 치밀한 국제법적 대응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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