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데뷔한 SM엔터테인먼트의 신인 아이돌 ‘에스파’는 8인조 걸그룹이지만 음악 방송 무대를 꾸리는 건 4명뿐이다. 나머지 4명의 멤버는 ‘ae-에스파’로 칭해지는 가상인간이기 때문이다. ae-에스파는 각 멤버의 인터넷 세상 속 자아가 발현돼 탄생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현실 아이돌과 괴리감이 있어 보이지만 실제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고 에스파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에도 소개되는 등 8인조로서의 모습을 더욱 견고히 하는 중이다. 전에 없던 새로운 마케팅에 거부감을 느끼던 대중들은 ae-에스파를 서서히 하나의 콘텐츠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을 이어가듯 최근 다양한 매체에서는 ‘버추얼 인플루언서’를 선보이고 있다. ‘가상의’라는 뜻을 가진 영단어 ‘virtual’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influencer’가 결합된 이 단어는 이제 대중문화 산업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약 10만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한 가상인간 ‘로지’는 명품 브랜드 화보는 물론 TV 광고까지 섭렵하며 버추얼 인플루언서라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 가상인간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 데뷔를 앞둔 버추얼 인플루언서 ‘한유아’의 모습(출처: ‘한유아’ 공식 SNS)
▲ 데뷔를 앞둔 버추얼 인플루언서 ‘한유아’의 모습(출처: ‘한유아’ 공식 SNS)

 
모델이 되고 셀럽이 되는 가상인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세계인이 모든 것을 비대면으로 해결하기 시작하면서 메타버스 산업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참고기사: 제759호 7면 「메타버스,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 가상인간의 한 종류인 아바타는 메타버스 이용자의 자아가 돼준다. 자연스레 가상인간의 존재감이 커졌고 문화 산업에서의 중요성 또한 상승했다. 그러나 가상인간 캐릭터로 게임을 즐기고 인터넷 세계의 SNS를 운영하는 것과 TV나 잡지에 그들이 실제 모델로 등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연예인이나 유명인의 자리를 허구의 인물이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존과 허상의 경계에서 대중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가상인간을 만든 제작사나 그들을 모델로 기용하는 기업 입장에서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화 산업의 생산자 위치에 있는 이들이 이러한 흐름을 이어가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가상인간은 실존 인물과 달리 스캔들에 구애받지 않는다. 연예인의 경우 크고 작은 추문으로 인해 이미지에 타격을 입고 모델로 활동 중인 브랜드에도 안 좋은 영향을 주곤 한다. 하지만 가상인간은 겉모습이 인간과 비슷할 뿐 매체 외에 다른 곳에서 사생활을 영유하지 않기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일도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출발부터 위험 요소를 하나 제거하고 가는 셈이다. 더불어 버추얼 인플루언서는 다채로운 변신이 가능해 기업이 추구하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연예인 모델에 비해 기업이 자사의 의견을 더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용 시간에 제약이 없음은 물론 수익을 배분할 때 갈등을 빚을 일이 없다는 것도 또 다른 이점이 될 수 있다. 활동 영역 또한 넓혀갈 수 있다. SNS 인플루언서는 물론 가수, 배우, 모델 등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이 가능하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사이버 인간의 역사

사이버 가수 ‘아담’이 바로 가요계 가상인간의 첫 예시다. 아담은 국내 최초 사이버 가수로서 활동 당시 약 20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데뷔 이후 6년만인 2004년에 자취를 감췄다. 90년대에 등장했던 만큼 기술력에 한계가 있었고 당시 대중매체의 특성상 음원 발매 이외의 활동을 이어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력의 부족 때문이었을까. 사이버 가수 아담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가짜’의 모습을 하고 있어 대중들로 하여금 그를 진짜로 착각하게 하는 혼돈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방송이나 영상 플랫폼에 등장해 노래를 부르거나 실존 인물과 대화를 한 경우도 없었다. 하지만 현재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발전해 ae-에스파가 뮤직비디오에 등장하고 로지가 은행 광고에서 춤을 추는 게 매우 자연스럽다. 특히 로지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실제 사람과 헷갈릴 정도이다.

 게임 회사 ‘스마일게이트’와 시각효과 스튜디오 ‘자이언트스텝’이 협업해 제작한 가상인간 ‘한유아’ 또한 정식 데뷔를 앞두고 있다. 아이돌로서 음원을 발매할 예정인 한유아는 이미 국제구호개발 비정구기구(NGO)의 기아대책 홍보대사에 위촉되는 등 다양한 활동에 시동을 걸고 있다. 아이돌 그룹의 가상 세계 멤버로 활동하는 ae-에스파, 다양한 브랜드의 광고 및 화보 모델로 대중에게 모습을 비추고 있는 로지, 연기와 음원 발매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할 예정인 한유아까지 가상인간은 대중문화에서 실제 인간과 같은 역할을 해내는 중이다. 자연스럽고 실감나는 외양 덕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오늘날 우리가 보고 접하는 가상인간은 단순한 작업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2D로 만든 캐릭터를 실감나는 3D 인물로 만들어내기 위한 모델링 작업을 진행한다. 뼈대를 구축하고 그 위에 신경망과 근육을 켜켜이 쌓은 후 피부를 씌우는 방식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가상인간은 90년대에 만들어진 사이버 가수 아담과 달리 표정 변화와 몸의 움직임이 인간처럼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과 닮은 가상인간을 보고도 ‘불쾌한 골짜기’ 현상을 느낄 수 있다. 불쾌한 골짜기란 로봇공학에서 나온 이론으로 인간이 인간을 닮은 듯하면서도 어딘가 이질감이 있는 대상을 향해 느끼는 불쾌감을 일컫는 말이다. 

로봇이나 인간이 아닌 무언가의 모습이 인간과 흡사할수록 호감도가 비례해 높아지다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호감이 거부감으로 바뀐다는 것이 해당 이론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이 설명에 따르면 외모와 행동이 인간과 구별 불가능할 정도가 되면 감정은 다시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수준까지 호감도가 증가한다. 따라서 가상인간은 생산을 거듭할수록 불쾌한 골짜기 현상을 넘어서서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에 가까워지는 가상인간은 양날의 칼과 같은 존재다. 딥페이크 범죄와 같은 부정적 결과를 생각하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가상인간을 반갑게 맞이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참고기사: 제751호 6면 「AI의 어두운 그림자 딥페이크 범죄」). 그러나 4차산업 시대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는 메타버스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기술이 발달할수록 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대중문화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긍정적 효과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부정적인 상황은 경계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시점이다.


오유빈 기자 
oyubin99@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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