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은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H.O.T, 젝스키스를 좋아하는 행위만을 덕질이라고 칭하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다이어리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문구 덕후’, 삼시세끼 라면을 먹는 사람은 ‘라면 덕후’로 통하는 시대가 왔다. 덕질이 취미와 취향을 통칭하는 말이 된 것이다. 이런 변화가 오기까지 예상치 못한 분야에서 팬덤이 형성되고 덕질이 선행으로 이어지는 등 많은 일이 있었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비대면 문화가 확산되며 새로운 문화 소비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아이돌 팬덤은 다른 업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다채로운 변화를 거듭하며 덕질 문화의 시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덕질 고인물, 아이돌 팬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 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이제는 나도 알 수가 알 수가 있어요”.
모두 한 번쯤은 들어봤을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도입부다.  ‘난 알아요’는 1992년 데뷔 무대에서 전문가에게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 노래로 단숨에 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 이유는 바로 ‘팬덤’때문이었다. 단순히 앨범을 사고 노래를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서태지와 아이들 사진을 모으고, 그들의 얼굴이 박힌 물건을 사고, 팬들끼리 행사를 기획하는 등 새로운 문화가 형성됐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우리나라의 덕질 문화의 시작 시기는 팬덤 형성과 맞물려있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의 대중문화가 90년대에 폭발적으로 확장되면서 본격적인 팬덤이 형성됐다”며 “팬덤이 하는 일종의 팬 활동이 덕질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 Stray Kids의 멤버 한의 팬 사인회 영상 통화
▲ Stray Kids의 멤버 한의 팬 사인회 영상 통화

좋아하는 방법은 모두 달라요

이유비(22) 씨는 얼마 전 좋아하는 아이돌 Stray Kids의 영상통화 팬 사인회에 참여했다. 아이돌 팬 사인회는 보통 해당 아이돌의 앨범을 한 장 구매할 때마다 응모권을 한 장씩 주고, 그 응모권을 모아서 추첨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대면 행사 개최가 어려워지자 온라인 영상통화로 바뀌었다. 이 씨는 “직접 만나지 못해 아쉽지만 좋아하는 멤버와 통화하는 장면을 녹화해서 이후에도 볼 수 있다는 점이 좋다”고 전했다. 코로나19 전에는 대면으로 진행한 팬 사인회나 팬 미팅, 콘서트 같은 행사에 다니면서 ‘덕질 메이트’를 만들기도 했다. 이 씨는 “같은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 팬 중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친해져서 함께 덕질을 한다”고 밝혔다.

“연습 기간이 짧은데도 무대를 훌륭하게 소화해 팀을 승리로 이끄는 모습을 보고 정원이를 좋아하게 됐어요”. 유한나(22) 씨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ENHYPEN의 팬이다. ‘최애’의 생일이 다가오자 친구들과 함께 ‘생일 카페’에 가기도 했다. 팬들은 좋아하는 아이돌의 생일에 맞춰 카페를 빌려 방문한 사람들에게 직접 제작한 ‘굿즈’를 주는 이벤트를 연다. 유 씨는 “보통 3~4개의 생일 카페 리스트를 짜고 동선을 미리 정해서 이동한다”며 “음료와 디저트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공유하기 위해 간다”고 답했다.
 

▲ 포토카드, 아이돌 인형과 함께 찍은 음식 사진
▲ 포토카드, 아이돌 인형과 함께 찍은 음식 사진

아이돌 덕질의 가장 큰 특징에 대해 이유비 씨와 유한나 씨는 입을 모아 ‘포토카드’라고 대답했다. 포토카드는 명함 크기의 아이돌 사진을 뜻한다. 보통 앨범을 사면 그 안에 한두 장의 포토카드가 랜덤으로 들어있다. 유 씨는 “최애가 아닌 멤버의 포토카드가 나오면 SNS를 통해 다른 사람과 교환한다”며 “직접 앨범 판매점에 가서 앨범을 살 때는 그 자리에 있는 팬들과 포토카드를 교환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포토카드로 인해 파생된 팬덤 문화도 많다. 먼저 음식을 먹기 전에 포토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는 인증샷 문화가 새로 생겼다. 또한 포토카드 케이스인 ‘탑로더’를 스티커나 데코덴 등의 재료로 꾸며서 포토카드를 더 예쁘게 만들기도 한다.

이유비 씨는 “덕질을 시작하고 자립심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이 씨는 “처음 은행 거래를 시도한 것이 아이돌 앨범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다”며 “공연 관람을 위해 전국에 있는 공연장을 혼자 찾아가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유한나 씨는 “유학을 가고 적응을 잘 하지 못해 힘들었는데 아이돌을 좋아하면서 에너지를 얻었다”며 “이후 좋아하는 아이돌을 직접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미술을 시작했다가 지금은 3D 애니메이션 학과에 진학했다”고 말을 이었다. 그들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행위가 즐겁고 행복하다며 앞으로도 덕질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극·뮤지컬계를 움직이는 큰손

주로 TV나 유튜브 영상 속 아이돌의 모습을 보고 좋아하기 시작하는 팬들과 달리 무대로 직접 찾아가는 덕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연극·뮤지컬을 비롯한 공연예술은 영화보다 오래됐으나 대중매체의 발달과 영상 매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접근성 때문에 시장규모가 작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공연시장 매출액은 1천 169억원이다. 반면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지난해 한국 영화사업 매출액은 1조 239억원이었다. 이렇게 공연예술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상황 속에서도 같은 극을 보고, 또 보고, 다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연뮤덕’이다. 지난 2020년 인터파크에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같은 극을 반복해 보는 연뮤덕은 전체 관람객의 약 20%를 차지했다. 같은 극을 반복해 관람하는 이유에 대해 정유진(화공 20) 씨는 “영화와 달리 연극과 뮤지컬은 순간의 예술”이라며 “같은 극을 봐도 당일의 배우 상태나 관객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 ‘회전문’을 돌아 많이 쌓인 연극·뮤지컬 티켓들
▲ ‘회전문’을 돌아 많이 쌓인 연극·뮤지컬 티켓들

 SNS 통해 ‘덕친’ 찾는 연뮤덕

연뮤덕의 특징 중 하나는 SNS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SNS에 양질의 후기를 올리거나 2차 창작을 하고 기념품을 제작해 판매하는 등 활발히 소통한다. 허유림(경영 20) 씨는 “다른 매체보다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떨어지는 만큼 주변에서 연뮤덕을 찾기가 쉽지 않다”며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SNS를 이용해야 한다”고 전했다. 허 씨는 “공연을 잘 모르는 지인과 함께 가면 밥을 먹거나 카페를 가는 등 불필요한 시간을 소모해야 하고 공연을 관람하면서도 지인이 만족했는지의 여부를 살피게 된다”며 “SNS를 통해 만난 연뮤덕은 오로지 공연 관람만을 함께하고 감상을 나눌 수 있어 좋다”고 전했다.  
 

▲ 연뮤덕이 수집한 프로 그램북과 팜플렛
▲ 연뮤덕이 수집한 프로 그램북과 팜플렛

그들의 또 다른 특징은 연뮤덕 간에 공유하는 은어가 있다는 것이다. 반복해서 공연을 감상하는 행위를 ‘회전문’,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를 ‘본진’, 공연 관람 중 타인을 방해하는 행위를 ‘관크’라 부르는 것 등이 그 예다. 김수경(도사 20) 씨는 “공연에 대한 정보를 얻고 함께 취미를 공유하기 위해 SNS를 기웃거렸던 적이 있다”며 “당시 알아들을 수 없는 줄임말과 낯선 용어들에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허 씨는 “다양한 줄임말과 은어가 낯설었지만 점차 적응하게 됐다”며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떨어지고 폐쇄적인 연극 뮤지컬계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문화”라고 덧붙였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공연계는 변화의 국면을 맞았다. 현장에서 공연을 감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며 공연을 실시간 녹화해 생중계하는 스트리밍 서비스가 활성화된 것이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활성화되며 자막 및 수어 삽입 등의 배리어 프리 요소가 가미됐고 공연 영상화 사업의 확대로 공연장으로의 접근성도 대폭 낮아졌다(▶참고기사: 제763호 8면 「배리어 프리, 객석을 넘어 무대 위를 향해」). 코로나19를 기점으로 급격히 변화하는 공연계에서 업계의 큰손인 연뮤덕의 행보가 기대되는 시점이다.


직관 불가, 그럼에도 즐기는 야덕

코로나19로 위기를 맞은 팬덤은 연뮤덕뿐만이 아니다. 
지난 2년간 방역수칙으로 무관중이나 제한된 인원으로만 경기를 치를 수밖에 없었던 야구를 빼놓을 수 없다. 야구 덕질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직관(직접관람)’이 어려워졌지만 ‘야구 덕후(이하 야덕)’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그들만의 덕질을 계속하고 있다.
 

▲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은 박규정 씨
▲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은 박규정 씨

한국에서 야구의 인기는 대한제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4년 미국 선교사 질레트가 선교 목적으로 YMCA 야구단을 창설했고 이후 70년대 고교야구를 중심으로 야구 인기가 높아졌다. 그러다 1982년 전두환 정부 당시 한국프로야구리그선수권대회(이하 KBO 리그)가 출범했다. KBO 리그는 같은 시기 출범한 다른 프로스포츠 리그에 비해 지역연고제가 초기에 잘 정착했고 당시 어린 팬들을 위한 마케팅에 힘쓰며 지금까지 가장 인기 있는 프로스포츠 리그로 거듭났다. 야덕들은 응원하는 팀에 무한한 애정을 보낸다. 하지만 이 감정은 팀에 대한 절대적 충성보다는 애증에 가깝다. LG 트윈스를 응원하는 박규정(23) 씨는 “LG 트윈스를 2009년부터 응원했는데 아직도 우승을 못 했다”며 “매일 야구 경기를 챙겨보지만 분통이 터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는 팀에 대한 자조적인 양상과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특정 스포츠팀에 대한 멸칭은 라이벌팀에서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프로야구에서는 오히려 그 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활발하게 사용한다. 박 씨는 “LG 트윈스의 멸칭은 계속 꼴찌를 한다는 의미의 ‘꼴쥐’”라며 “꼴쥐는 다른 팀보다 LG 트윈스 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유사 사례로 한화 이글스 팬들을 이르는 말인 ‘보살’이 있다. 한화 이글스가 계속 하위권에 전전해도 팬들이 순위를 받아들이고 계속 응원하는 모습이 보살과 같단 의미다. 이는 프로야구에서 특히 발달한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와 연결된다. 응원팀 커뮤니티에서는 경기의 ‘움짤(움직이는 사진)’을 공유하거나 선수들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는 모습으로 콘텐츠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특정 팀에 대한 멸칭 역시 주로 커뮤니티에서 생산되고 사용된다. kt 위즈를 응원하는 최창민(21) 씨는 “커뮤니티에서 같은 팀을 응원하는 팬들끼리 연대감을 느낀다”며 “리그가 진행되지 않는 스토브리그에는 FA(자유선수계약제도) 조건을 충족한 선수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답했다.
 
세이버메트릭스, 색다른 덕질의 시작

KBO 리그 경기를 관람하는 것 외에도 야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 야덕 중에는 야구 통계학인 세이버메트릭스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참고기사: 제744호 8면 「통계와 빅데이터의 스포츠, 야구」). 야구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통계적 수치로 환산하기 쉬워 세이버메트릭스가 발달했다. 이는 ‘Baseball reference’나 ‘Statiz’ 같은 야구 통계 사이트에 공유돼 팬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지난 2020년 종영한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영향으로 한국에 세이버메트릭스가 퍼지며 KBO 리그 중계에서도 WRC+*WAR** 같은 세이버메트릭스 지표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지표를 활용하면 활동 시기와 국적을 불문하고 다양한 선수들을 비교·분석할 수 있다. 최창민 씨는 “세이버메트릭스를 통해 1994년의 이종범과 2015년의 에릭 테임즈를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다”며 “팬들은 이를 활용해서 만든 라인업을 공유하며 간접적으로 경기에 참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덕후는 어디에나 있다

마니아를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로부터 변형된 단어인 ‘덕후’가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예전에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만 덕질을 한다고 생각했다”며 “과거 ‘빠돌이’·‘빠순이’라는 용어로 팬들을 비하하던 시절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덕질은 누구나 향유하는 문화가 됐다. 정 평론가는 “이제는 자기가 덕질할 수 있는 대상을 스스로 찾는 시대가 왔다”고 덧붙였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나는 이걸 좋아하니까 이걸 덕질할 거야’라고 말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따라서 어떤 것이든 덕질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해야만 하는 일의 바깥에서 좋아하는 일을 통해 자아를 찾는 고차원의 행위가 곧 덕질이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 평론가는 “덕질은 이제 아주 일상적으로 누구든 하는 것”이라며 “어떤 면에서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차원까지 확장됐다”면서 덕질의 위상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WRC+: Weighted Runs Created, 조정득점 창출력
 **WAR: Win Above Replacement, 대체 수준 대비 승리 기여도


글·사진_ 안가현 기자 worldisred0528@uos.ac.kr
오유빈 기자 oyubin99@uos.ac.kr
이주현 기자 xuhyxxn@uos.ac.kr
최윤상 기자 uoschoi@uos.ac.kr
사진제공_ 이유비, 유한나, 정유진, 박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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