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일본의 교육부인 문부과학성은 내년부터 고교생이 사용할 검정 교과서를 발표했다. 문부과학성은 학습지도요령(한국의 교육과정에 해당)과 교과서 검정기준으로 검정 과정에서 일본 정부의 역사 관점을 교과서에 반영시킬 수 있다. 이번 검정에 통과한 역사 교과서는 일제강점기 ‘위안부’와 조선인 강제징용 그리고 독도 문제에서 역사 왜곡을 자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왼쪽부터 후소샤의 『개정판 새로운 역사 교과서』, 『고등학교 한국사 국정 교과서 현장검토본』, 『미래를 여는 역사』
▲ 왼쪽부터 후소샤의 『개정판 새로운 역사 교과서』, 『고등학교 한국사 국정 교과서 현장검토본』, 『미래를 여는 역사』

어제오늘이 아닌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가 대두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2년 교과서 파동과 2001년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이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1982년 교과서 파동은 역사 교과서가 국제적 문제가 된 첫 사례다. 1982년 당시 교과서 검정 결과가 나오자 일본 「아사히신문」이 식민지배와 침략 사실을 왜곡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것이 한국과 중국에 전해지며 반일 감정이 급속도로 퍼졌고 한국과 중국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근현대사를 기술할 때 국제 이해에 기반해 교과서를 검정해야 한다는 『근린제국조항』을 신설하며 갈등을 봉합했다. 이어 냉전체제 해체 후 세계 2위 경제력에 상응하는 국제정치력을 확보하려 했던 일본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시기 일본 정부에서 ‘위안부’와 식민지배 사과 담화를 발표했고 역사 교과서 역시 진일보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1996년 중학교 역사 교과서 검정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기술이 등장했다. ‘도쿄서적’ 역사 교과서는 한 면을 조선인 강제동원 칼럼으로 채우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일본이 경제침체를 겪으며 역사 교과서는 퇴행했다. 일본 보수파는 사회적 위기를 애국심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이들은 과거사를 인정하는 역사 교과서를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했다. 1997년 새역모를 창설하고 역사 교과서 편찬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발간된 ‘후소샤’ 검정 교과서는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침략정책을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등 극우적 관점에서 서술됐다. 국가적 대응에 더해 시민단체 간 교류 성과로 후소샤 교과서는 0.4% 의 채택률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가 계속되고 있고 양상 역시 고대사 그리고 독도 영유권까지 점차 확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2000년대 이후 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지면서 중국과도 역사 교과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 교과서 논쟁 한일만의 이야기 아냐

역사 교과서 서술 논쟁은 한국 내부에서도 격렬하게 나타났다. 지난 2015년 박근혜 정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가 대표 사례다. 미군정 이후 역사 교과서는 검정체제였지만 유신 이후 1974년 국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2002년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검정으로 기술되기 시작했고 2007년 ‘국사’가 ‘한국사’로 바뀌면서 역사 교과서는 검정체제로 돌아왔다. 그러던 중 박근혜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가 좌편향됐다며 국정화하려 시도했다. 많은 역사학자와 역사 교사들이 반발했고 지난 2017년 한국사 국정화 교과서는 결국 폐기됐다.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기경량 교수는 “역사학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과 상호 토론을 중시한다”며 “국정화는 국가가 선택한 역사상이 지나치게 강한 권위를 가지게 되면서 이를 경직시켜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역사의 타당성은 훈련받은 전문가에 의해 오랜 시간 검증받아야 한다”며 “‘뉴라이트’ 역사관을 가진 이들이 자신들의 역사상을 주류화하고 싶은 욕망으로 정치 권력과 결합해 국정화를 시도해 많은 반발을 샀다”고 분석했다.

한편 기 교수는 ‘사이비 역사학’에서 비롯한 고대사 서술 논쟁도 언급했다. 그는 “70~80년대 ‘사이비 역사학’ 추종자들에 의해 국사 교과서 파동이 있었다”며 “정치인들이 이들 주장을 국사 교과서에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고조선 건국 시기 설명이 있다. 기 교수는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됐다는 서술은 조선 초 『동국통감』의 계산을 따른 것일 뿐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없다”며 “한국사에서 청동기 시대 시작을 기원전 10~15세기로 보고 있는데 기원전 2333년은 신석기 시대”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한국사 교과서에 청동기 시대에 계급 사회가 출현하기 시작했다는 기술과 국가가 성립될 수 없는 신석기 시대에 고조선이 건국됐다는 모순적인 표현이 공존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 논쟁의 근원은

이렇듯 동아시아의 역사 교과서 논쟁은 주로 고대사와 근현대사에서 발생하고 있다.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김정인 교수는 “고대사의 경우 민족 패권주의 의식과 관련이 있다”며 “민족 기원 시기를 올리고 영토를 넓히는 사례가 교과서에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기경량 교수는 “근현대사는 현재 정치 권력 집단들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존재한다”며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역사를 통해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고 분석했다. 한편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정책실장은 동아시아의 근대 역사학 수용 과정에 주목했다. 남 실장은 “근대 역사학은 제국주의 국가에서 시작했다”며 “일본은 이를 수용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유를 고대사 속에서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고대사 인식이 중국 사회까지 퍼졌다”고 덧붙였다. 

식민사관에 기초한 역사 인식은 한국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기 교수는 “‘사이비 역사학’은 식민사관을 배격하고 올바른 역사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며 “하지만 이들 역시 식민사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일선동조론’이 있다. 기 교수는 “식민사학은 일본인과 조선인은 조상이 같아 근대에 일본으로 합쳐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일선동조론을 주장했다”며 “‘사이비 역사학’은 주어만 바꿔 한민족이 일본 열도를 정복한 형의 역할이었다고 주장하는 식으로 식민사관을 극복했다고 흡족해한다”고 설명했다.

역사 분쟁 세계와 미래를 향해야

동북아 역사 교과서 문제의 해법으로 전문가들은 일국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세계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고 입 모아 주장한다. 남상구 실장은 “세계와의 비교를 통해야 우리 아픔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고 해결방안도 찾을 수 있다”고 전했다. 과거 한국 학계는 한국의 식민지배를 특수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남 실장은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다른 식민지국들이 어떻게 식민지배를 극복하려 했는지 알아봐야 우리의 성과와 부족한 점을 볼 수 있다”며 “일본에게도 단순히 사과를 요구하기보다 타 제국주의 국가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세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역모 사태 이후 시민 사회를 중심으로 공동역사교재를 편찬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첫 결과물이 2005년 동아시아 공동역사교재 『미래를 여는 역사』다. 교재 편찬에 참여했던 김정인 교수는 “공동 교재에는 한·중·일 역사학자 간 논의를 거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가야 했다”며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고 한국사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김 교수는 “시민사회 간 교류와 협력을 통해 역사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문가들은 역사 교육 역시 인류 보편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일제강점기 때나 해방 후 한참 동안은 민족주의가 유효했지만 현재 민족주의는 패권주의로 변질될 위험이 훨씬 크다”며 “인권과 평화 같은 세계적 가치를 중심으로 역사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누가 우리를 깎아내리든 관계없이 우리가 누군가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며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역사 교육이 변화해야 한다”고 전했다. 남 실장 역시 “앞으로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면서 민족으로 포괄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길 것”이라며 “보편적 가치를 역사 교육 중심에 둘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최윤상 기자 
uoschoi@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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