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부터 오전 8시 경복궁역 7-1승강장에서 “예산 없이 권리 없다!”, “장애인권리예산쟁취를 위한 인수위의 답변을 촉구한다!”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장애인 권리예산 및 관련법 개정 요구에 대한 인수위 답변 촉구 삭발 투쟁 결의식’ 진행을 위해 전장연 활동가들이 모인 것이다. 4차 삭발 투쟁 자원자인 배재현 활동가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아내며 결의문을 낭독했다. 
 

▲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함께 고개를 떨구는 배재현 활동가
▲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함께 고개를 떨구는 배재현 활동가

그는 “경험하지 않은 진실은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삭발 투쟁으로 (사회가) 변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7차 삭발에 참여한 문경희 세종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의 결의문에는 다음 내용이 담겼다. “21년 동안 우리가 외친 것은 단 하나,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이동해야 하고 교육받아야 한다. 노동하며 다양한 삶을 꿈꾸는 지역 사회에서 살고 싶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 멈추지 않는 투쟁

전장연은 지난해 12월 제20대 대선 후보들에게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하며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4호선 혜화역까지 이동하는 ‘출근길 지하철탑니다’ 시위를 전개했다. 윤석열 후보가 당선된 이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 측에 ‘2023년 장애인권리예산반영’과 ‘장애인권리민생4대법안’에 대한 책임 있는 답변을 촉구하며 시위를 이어나갔다. 이에 인수위는 요구안을 충분히 검토하겠으니 출근길 시위를 멈춰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지난달 30일부터 전장연은 출근길 시위를 멈추고 오는 20일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장애인의 날)’까지 경복궁역에서 삭발 투쟁을 진행할 것을 발표했다. 경복궁역이 삭발 투쟁 결의 장소가 된 것은 근처에 인수위가 위치한 금융감독원 연수원이 있기 때문이다. 삭발 후에는 혜화역 5-4승강장으로 이동하는 ‘혜화역 출근 선전전’도 진행한다. 이는 기획재정부에 장애인권리예산을 보장하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진행하는 시위다.

이동권 시위의 시작은 2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1년 오이도역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하던 장애인 부부가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장애인들은 이동권 보장을 요구해왔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2004년까지 서울 지하철 전 역사 엘리베이터 설치를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도 2022년까지 100% 설치를 약속했다. 그러나 전장연 측은 “서울시가 약속과 달리 장애인 권리 보장을 위한 예산을 삭감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 철제 사다리와 쇠사슬을 목에 감은 활동가들의 모습. 첫 이동권 시위 당시 지하철 선로에 내려가 투쟁하던 활동가들을 해산시키려는 경찰에 맞서 쇠사슬과 사다리를 건 채 버티던 결의의 계승이다.
▲ 철제 사다리와 쇠사슬을 목에 감은 활동가들의 모습. 첫 이동권 시위 당시 지하철 선로에 내려가 투쟁하던 활동가들을 해산시키려는 경찰에 맞서 쇠사슬과 사다리를 건 채 버티던 결의의 계승이다.

수치상 93% 실상은 0%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달 28일 열린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이미 서울시 내 약 93%의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높은 엘리베이터 보급률에도 불구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그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이동석 교수는 “장애인 이동권을 수치로만 판단한다면 허상에 빠질 수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설치율이 100% 미만이라면 이동 중 엘리베이터가 존재하지 않는 어딘가에서 반드시 통행이 막히게 돼 있다”며 “이 경우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이동권은 0%”라고 설명했다. 

저상버스 보급률과 엘리베이터 설치율이 100%에 도달해야만 진정한 이동권 보장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저상버스 보급률은 엘리베이터 설치율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 2020년 7월 기준 전국 저상버스 보급률은 28.4%로 가장 높은 보급률을 보이는 서울시 역시 56.4%에 불과하다. 일각에서는 점진적인 설치와 도입을 통해 차차 100%에 도달하자는 의견도 제기된다. 이에 이 교수는 “20년 동안 천천히 엘리베이터를 늘린다면 이동권은 계속 0에 머물러 있다가 20년 후에야 100%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 하차 중인 활동가의 모습. 교통공사직원들이 발판을 밟아 이동을 돕고 있다.
▲ 하차 중인 활동가의 모습. 교통공사직원들이 발판을 밟아 이동을 돕고 있다.

열차는 5분 지체, 권리 실현은 20년 지체

출근 시간 인파로 가득 찬 열차 플랫폼. 삭발 투쟁을 마친 장애인들이 혜화역으로 가기 위해 줄을 섰다. 열차 한 칸에는 하나의 휠체어만 탑승해야 했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다 같이 타면 시간이 지체된다는 지적이 있어 한 칸에 한 명씩만 타겠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교통공사 직원들은 하나의 발판을 매 칸 이동하며 휠체어 앞에 놓았다. 발판이 여러 개 있다면 겪지 않아도 될 불편이지만 역사마다 한두 개만 구비돼 있으므로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박 이사장은 탑승 전 승객들을 향해 “일부러 발판을 사용해 연착을 의도하는 것 아니냐는 말들이 있다”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승강장 사이 간격에 바퀴가 빠져 사람이 다친 적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휠체어들은 혜화역으로 향하는 내내 정차하는 역마다 타고 내렸다. 기자들이 느끼기에도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시간을 끄는 듯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부 시민들은 “왜 이 시간에 난리야”, “이것들 또 지랄이네”, “빨리 좀 출발합시다”라며 큰 소리로 질책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기자들은 적나라한 욕설과 비난에 당황했지만 전장연 일원은 “이분들은 출근 못 한 지 20년이에요”라며 담담하게 대응했다. 혜화역에 도착해 만난 임미경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활동가에게 날카로운 목소리에 놀랐다고 이야기하자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은 다른 날에 비해 매우 양호한 편이었어요”.

시민들은 시위 배경과 장애인들의 심정에 공감한다면서도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매일 아침 경복궁역에서 열차를 기다린다는 송원재(25) 씨는 “시위 방식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대 김 모 씨 또한 “의견 표출이 중요한 건 맞지만 왜 선량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는지 모르겠다”며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생각이 덜해졌다”고 전했다. 시민들은 대체로 시위가 이뤄지는 시간대와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인터뷰에 응한 시민들은 입 모아 “시위 이후 장애인을 향한 혐오 표현이 거세지고 있다는 데 공감한다”고 말했다. 시위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시민들조차 체감할 정도로 혐오 표현이 만연해졌음을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 혜화로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충무로역에서 줄을 선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이다.
▲ 혜화로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충무로역에서 줄을 선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이다.

정치권의 무응답이 낳은 장애인 혐오

“전장연의 시위는 시민을 볼모로 삼고 있다”는 이준석 대표의 발언에 대해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장애인단체가 야기한 불편의 문제로 비틀어버린 것 자체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비판했다. 시민 뒤에 숨어 혐오를 조장하는 이 대표의 언행을 지적한 것이다. 이동석 교수는 장애인들이 시민들을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시위를 강행하는 이유를 “20년이 넘는 기간 이동권 보장을 요구했지만 정치권이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비장애인의 목소리에만 답하는 정치권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시민들이 불만을 호소하도록 의도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시민들이 불편을 겪는 것에 대해 “시위를 하는 장애인이 아닌 정치권이 사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치권이 장애인의 요구에 즉시 응답하고 조처를 했다면 출근길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데도 반성하기는커녕 시민들이 장애인을 혐오하도록 조장하는 것에 부끄러워해야 한다”며 “시민들의 불만을 장애인 탓으로 돌려 혐오를 조장할 게 아니라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혐오 논란의 원인은 오래전부터 이어진 정치권의 소통 부재라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는 혐오 표현에 대해 최형두 국민의힘 의원은 “시위가 혐오 논란으로 변질되고 있는 점이 무척 안타깝다”며 “언론의 객관적인 보도도 중요하지만 정치권이 이를 정쟁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전했다. 최 의원은 언론이 갖춰야 할 태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목소리가 크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해서 보도의 크기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며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모든 국민이 평등한 사회 구성원이라는 인식이 공유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전장연 시위 또한 다양한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전달해야 공감을 넘어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혐오 속에서도 움트는 연대의 목소리

시위에 불편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연대하는 이들도 있다. 혜화역 5-4승강장 벽에는 ‘우리의 연대는 혐오보다 강하다’, ‘모두가 누릴 수 없다면 평등이 아니다’ 등 연대와 지지를 표하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전장연 측은 “SNS 등에서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된 논쟁이나 토론 시 응원의 목소리를 내주면 감사할 것”이라며 “메일로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시면 활동가들이 함께 읽으며 힘을 낸다”고 전했다.

정치권도 연대와 지지를 표했다. 지난 2일 71명의 여야 의원은 장애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를 보장하자는 ‘장애인 인권보장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 함께한 최형두 의원은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고 차별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여전히 여러 분야에 차별이 존재한다”며 “보편적 일상조차 차별받고 있는 장애인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입법적, 정책적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는 점에서 성명에 협력했다”고 밝혔다. 

이어 “장애를 가진 국민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보편적이고 동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길 꿈꾼다”고 전했다. 지난 6일에는 약 10명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휠체어를 탄 채 대중교통을 타고 출근하는 ‘휠체어 출근 챌린지’를 진행하기도 했다. 챌린지에 참여한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당사자가 돼보지 않고선 느낄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며 “장애인 이동권은 엘리베이터 설치가 끝이 아닌 시작임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장애인에 대한 사회 인식 개선까지 이어지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예산 반영 없는 정책은 기만

휠체어 챌린지, 인권 성명 등에 참여한 것만으로 진정 이동권 보장을 위한다고 평가하기는 이르다. 이동석 교수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표를 얻기 위한 보여주기식 행동이었다면 장애인 관련 예산은 올해도 우선순위에서 밀릴 것”이라며 “예산에 변화가 있어야만 진정으로 장애인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기획재정부가 예산안을 잘 짜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종 통과는 국회에 달려있다”며 협치를 당부했다. 실제 한국장애인개발원이 지난 1월 발표한 「2021 장애통계연보」를 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장애인 복지예산 비율은 0.6%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2.02%)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최하위권 수준이다. 장혜영 의원은 “장애인 관련 정부 예산이 적어도 OECD 국가의 평균 수준은 될 수 있도록 확대해나가는 노력도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장연은 “기획재정부가 지원 예산을 제대로 편성하지 않는다면 엘리베이터 설치, 저상버스 확충을 위해 비용을 지급해야 하는 지자체는 책임을 전가하며 시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이동권뿐 아니라 장애인의 평생교육권, 탈시설권과 같은 권리 실현에는 비용이 수반된다”며 “이 비용은 정부 예산으로 계획되고 실현돼야 한다”고 행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들은 “비장애인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작은 계단 하나 때문에 학교에, 일터에,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하는 삶들이 여전히 많다”며 “시위로 겪는 잠깐의 불편 덕분에 더 많은 사람이 해방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장애인의 이동권이 완전히 보장되는 사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회, 모든 장애인이 지역 사회에서 자신의 권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매일매일 힘차게 싸워나갈 것”이라며 굳은 다짐을 드러냈다.


글·사진_ 김은정 기자 e0623j@uos.ac.kr
오유빈 기자 oyubin99@uos.ac.kr
채효림 기자 chrim77@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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