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빈 학술문화부장
오유빈 학술문화부장

‘당시 계엄군들도 또 다른 의미의 피해자’. 지난 19일 SBS 인기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5·18민주화운동 편에 등장한 자막이다. 하지만 한강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5·18에는 특별히 잔인하거나 다소 소극적인 군인만 있었을 뿐이다. 시민을 보호한 정의로운 군인은 없었다. 이러한 계엄군을 세뇌당한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오만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시민을 직접 쏴 죽이고, 죽임에 가담하고, 방관했던 행동들을 세뇌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피해자들은 고문당하고,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고, 종국에는 제 목숨까지 잃었던 게 5·18의 상황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확대됐을 당시, 군은 거리에서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발사했다. 인도적 이유로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던 납탄을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 중 일부다. 책을 읽고 나면 방송 자막에 더욱 공감할 수 없게 된다.

기사를 쓰기 위해 책을 읽고 여러 자료를 찾아보면서 여러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어떻게 군대가 시민을 그렇게 무참히 폭행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통에 울부짖는 사람들을 끝끝내 죽이고 짐짝 다루듯 끌고 가는 행동은 자의 없이 이뤄질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사회는 군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애써 만들어주려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일부 몰상식한 이들이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편견에 갇힌 시선을 공고히 만든다. 분노가 치미는 지점이다.

전두환이 남긴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다’라는 말은 백 번 사죄해도 모자를 파렴치한 발언이었지만 그는 결국 한 마디의 사과도 남기지 않은 채 죽었다. 광주를 고립시키고, 시민들을 때리고 죽이라고 지시한 행동에 대한 일말의 반성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자의 사망을 두고 높임 표현인 ‘서거’를 쓰는 언론들은 그의 일생마저 존중하고 있었다고 봐야 할까. 현대 대한민국은 여전히 지역 혐오를 일삼으면서도 선진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까.

이렇듯 분노와 의문만을 남기는 5·18에 대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2022년에는 학보사의 기자로, 그중에서도 문화부장으로 일하고 있어 조금은 더 공식적인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문화면을 관련 기사들로 채우기로 한 것이다. 지난 18일, 3년 만에 열린 축제에서 본 행복해하는 학생들의 모습과 그날 밤 신문사실로 돌아와 읽은 소설의 괴리감 사이에서 5월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금 떠올렸다. 

5월은 가족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가정의 달. 전국의 대학에서 축제가 열리는 축제의 달. 그리고 앞장서 시위를 이끈 수많은 대학생이 다치거나 죽은 달.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오늘날까지도 슬픔에 잠기는 달. 우리는 5·18을 하나의 사건이 아닌 지금을 있게 한 민주주의의 시작점으로 봐야 할 것이다.


오유빈 학술문화부장
oyubin99@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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