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최초의 문학작품인 김준태 시인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의 한 구절이다. 특유의 강한 어조에서 당시의 절박함과 슬픔이 전해진다. 올해로 5·18 민주화운동은 42주년을 맞이했다. 이를 기념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리는 5·18 민중항쟁 제42주년 서울기념식과 전시회에 방문했다. 
 

▲ 5.18 항쟁보고를 진행 중인 518민주화운동서울기념사업회 장신환 회장
▲ 5.18 항쟁보고를 진행 중인 518민주화운동서울기념사업회 장신환 회장

5월 18일, 그날의 역사 속으로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공포된다. 사건의 진상조사 담당자는 군 보안사령관 전두환이었다. 그는 사건을 조사하며 권력기관을 주무르다가 12·12사태**를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한다. 이는 박정희 세대 군인과 구별되는 전두환 중심 신군부 세력이었다. 

많은 시민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 정권에 이어 신군부 세력이 무력으로 권력을 잡은 것에 분노했다. 이에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 약 10만 명의 대학생들이 모여 계엄령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군 투입 소식이 전해지며 해산했다. 서울 시위는 중단됐지만, 5월 16일 광주 도청 앞 광장에서 대학생들의 집회가 열렸다. 이에 5월 17일 비상계엄 대상 지역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돼 계엄사령부의 권한이 강화됐고, 전국 대도시에 군부대가 투입됐다. 주요 진압 지역은 서울과 광주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5월 18일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고 전두환은 무력으로 대응했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로 특전사 공수부대가 광주에 출격했다. 시위대는 점점 늘어났지만, 군인들은 곤봉과 총 등으로 무장해 무고한 시민들을 살상하기 시작했다. 이에 시민군이 결성돼 관공서 무기고를 털어 무장했다. 하지만 5월 27일 새벽, 헬기와 탱크 그리고 소총과 수류탄 특공대가 투입돼 잔혹한 살상이 벌어졌고 결국 수많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남긴 채 항쟁이 끝났다. 당시 언론은 통제됐고 광주 시위를 ‘폭도들의 난동’으로 지칭했다. 민간인 피해도 없다고 보도됐다. 광주는 철저히 고립된 것이다. 그 후 간접선거를 통해 전두환이 당선돼 신군부 세력이 국가권력의 전체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민주 영령을 추모하며 

5월 18일 오전 10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야외 마당에서 기념식이 시작됐다. 이번 서울기념식의 개최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행사를 주최한 5·18민주화운동서울기념사업회 장신환 회장은 “5·18 운동은 매우 강렬하고도 고통스럽고 숭고한 운동이었기에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계승하는 데 목적을 뒀다”고 강조했다. 

이 행사는 5·18 유공자들과 국회의원들이 참석하는 공식적인 국가 기념행사로 광주와 서울에서 동시에 개최된다. 대표 헌화와 5·18 항쟁사 경과보고 등 추모와 기념사가 이어졌다. 5·18 당시 광주에서 두 동생을 잃었던 아픔을 담은 편지를 낭독하는 시간도 있었다. 

다음은 기자가 인상 깊게 들었던 임채웅 씨의 부치지 못한 편지 중 일부이다. ‘나는 오월이 싫다. 42번째 5·18 민주항쟁을 맞으면서도 두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발포 명령자는 밝혀지지 않고 슬픔만 배가되는 오월이 나는 정말 싫다’, ‘무고한 꿈을 한순간에 앗아간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이 오빠는 눈을 부릅뜨고 있다’, ‘참다운 민주주의 세력이 꼭 오도록 다시 소신공양 같은 우리를 던진다. 우리 손으로 새벽을 열자’. 임채웅 씨는 첫 소절부터 울컥했지만 먼저 간 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담담하게 낭독을 마쳤다. 낭독이 끝난 후 박수갈채가 이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5·18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기자 또한 광주의 희생과 고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무대 위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민주 영령 추모 시민 헌화와 분향이 준비됐다. 기자도 안내위원이 전해준 국화꽃 한 송이를 가지고 헌화에 참여했다. 헌화에 참여한 5·18 유공자 김명석(63) 씨는 “영령분이 좋은 곳에 계시길 바라며 나라가 바로 돌아가도록 뒷받침해 주시라고 기도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 서대문형무소 야외마당의 5.18 사진전
▲ 서대문형무소 야외마당의 5.18 사진전

5월 18일의 발자취를 엿보다

중앙사와 취사장 사이에서는 5·18 특별 전시회가 진행 중이다. 전시회는 5·18 항쟁사 연표전과 사진전으로 구성됐다. 5·18은 1980년 광주라는 시공간 속 갇힌 역사가 아닌 동학에서 내려오는 민중 운동사 속에서 솟아오른 봉우리이며, 아직도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내용이 연표전에 담겼다. 관람객들은 주로 글로 이뤄진 연표전보다 사진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사진을 보며 자녀에게 5·18에 관해 설명해 주는 부모님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전시를 관람하던 문인성(59) 씨는 “전시된 사진들은 당시 볼 수 있었던 모습이지만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있어 정말 잔혹했던 부분까지는 담지 못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길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의 모습이나 아들의 관을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의 사진보다 더 잔혹했다니 현실은 얼마나 가혹했던 것일까. 이제까지 주로 정제된 내용을 담은 교과서로 접해왔기 때문인지 5·18을 직접 겪은 시민 분의 이야기는 놀랍게 느껴졌다. 

야외 전시를 관람하고 바로 앞 건물인 중앙사로 들어오면 서울청소년대회 문예 공모전의 역대 수상작과 5·18을 주제로 한 세계 각국의 전시를 볼 수 있다. 5·18을 주제로 한 세계 전시는 ‘전국화에 앞서 세계화가 먼저’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한국 언론이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던 당시 최초로 광주의 소식을 알린 건 외신이었고 이들의 기사는 전 세계로 퍼졌다. 광주에 거주하던 해외 선교사들과 평화봉사단 활동가, 일본 지식인과 재일 민족단체들도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5·18을 국외적 시점으로 바라본 전시는 처음 접해 새로웠고 5·18이 우리나라 민주화에 이바지했음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까지 국외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5월 18일을 의미 없이 보내기보다 그날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민주주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건 어떨까. 


*10·26사태: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
**12·12사태: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글·사진_ 이유진 수습기자 uzzin0813@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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