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으로 정부청사를 이전했다. 이와 동시에 1948년부터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로서 기능해온 청와대는 74년간의 임무를 마무리하고 국민에게 개방됐다. 과거 대통령이 국내외의 중요한 손님을 청와대에 초대하기도 했고 인터넷 예약을 통해 청와대 관람이 진행됐지만 모든 공간이 개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면 개방된 청와대를 기자가 직접 방문해 봤다.
 

▲ 청와대의 집무실인 본관(좌)과 한옥식 가옥으로 개조된 상춘재(우)
▲ 청와대의 집무실인 본관(좌)과 한옥식 가옥으로 개조된 상춘재(우)

‘남경 이궁’부터 ‘푸른 지붕 기와집’까지

청와대 터가 최초로 언급된 것은 고려시대다. 『고려사』에 따르면 숙종 9년인 1104년 남경(서울)에 왕이 외출했을 때 머무를 수 있도록 청와대 터에 이궁(離宮)을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청와대 터가 도읍 후보로 올랐지만 태조가 거부하며 무산됐다. 이후 청와대 터는 경복궁의 후원으로서 무과 시험장으로 사용됐고 ‘무예를 구경하는 대’란 뜻의 경무대(景武臺)로 불렸다. 조선 후기엔 무관 훈련을 위한 융무당과 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경농재 등 256칸의 건물이 지어졌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청와대 터는 조선총독부(이하 총독부)가 소유했다. 기존 건물들이 철거된 채 공원으로 쓰이던 이곳은 1939년 총독부 관사가 지어져 1945년까지 사용됐다. 광복 이후엔 미군정 최고책임자인 존 하지 중장이 관사로 사용했고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한국에 반환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이곳의 이름을 조선시대에 사용되던 경무대로 되돌렸고 1층은 집무실, 2층은 생활공간으로 사용했다. 이후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축출되자 윤보선 전 대통령은 독재정권의 대명사였던 경무대라는 이름을 버리고 청와대라는 현재의 명칭을 채택했다. 이후 군부독재 시기 녹지원과 비서실, 영빈관과 상춘재가 지어졌고 노태우 정부 때는 춘추관과 대통령 관저, 본관이 완공되며 오늘날 우리가 보는 청와대의 모습이 갖춰졌다. 

청와대 경내 탐방(上): 영빈관에서 수궁터까지

영빈문에서 청와대 예약 후 휴대전화로 받은 바코드를 찍고 입장하며 관람을 시작했다. 수많은 인파를 뚫고 영빈문을 통과하니 영빈관이 보였다. 1978년 지어진 영빈관은 외빈들을 접대하기 위한 2층 건물로 1층은 외빈 접견장, 2층은 만찬장으로 사용됐다. 외부 촬영 후 영빈관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내부 전시 준비 중’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출입이 통제된 상태였다. 자원봉사자에게 물어보니 개방된 지 얼마 안 돼 청와대 건물 내부 관람은 준비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음 건물로 향했다.

영빈관 옆 언덕을 올라가자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됐던 본관이 나타났다. ‘푸른 지붕의 기와집’이란 이름답게 청기와가 반짝이고 있었지만 사실 청와대 지붕은 황색이 될 수도 있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후 청와대를 ‘황색 지붕의 기와집’이란 뜻의 ‘황와대’(黃瓦臺)로 바꾸잔 주장이 제기됐다. 대통령은 국가 최고지도자이므로 황제가 쓰는 황색을 사용해야 옳다는 게 이유였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거절하며 청와대는 청색으로 남았다.

본관에서 관저로 이동하던 중 수궁터라 불리는 거대한 공터가 나타났다. 지금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심은 나무와 벤치 몇 개만 있는 공간이지만 이곳은 과거 총독부 관사가 위치한 장소였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벽돌 건물인 총독부 관사는 광복 후에도 정부청사로 사용됐다. 1990년과 1991년 관저와 본관이 완성되자 건물의 사후 처리를 두고 논쟁이 일었다.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철거해야 한단 의견과 청와대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보존하잔 의견이 충돌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 지시로 결국 1993년 철거됐다.
 

▲ 청와대로 온 손님들을 맞이하는 영빈관
▲ 청와대로 온 손님들을 맞이하는 영빈관

청와대 경내 탐방(下): 관저에서 춘추관까지

수궁터에서 산을 따라 걷다 보니 관저의 기와지붕이 보였다. 1990년 지어진 관저는 대통령의 개인 공간으로 청와대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이다. 생활공간인 본채와 접견 공간인 별채 외에도 뜰과 사랑채가 존재한다. 뜰은 들어갈 수 없었지만 본채와 별채 앞까진 관람할 수 있었다. 청와대 건물 중 유일하게 전통 한옥 구조로 지어진 건물답게 ㄱ자 청기와지붕은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다만 관람로가 협소해 천천히 건물을 관람하기 어려웠던 점은 아쉬웠다.

관저에서 내려가면 조그마한 기와집인 상춘재가 나타난다. 총독부 관사 별관이었던 이곳은 일제강점기 매화실로 불렸다가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항상 봄이다’라는 뜻의 상춘실로 개명했다. 원래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어진 서양식 목조건물이었지만 청와대에 전통 가옥이 하나도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1983년 한옥식 가옥으로 개조됐고 이름도 상춘재로 바뀌었다. 정부청사 시절엔 외빈들에게 우리나라 가옥 양식을 알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됐다. 상춘재 앞엔 소나무와 무궁화, 매화가 심어진 정원이 있다. 크기는 작았지만 한옥인 상춘재와 어울려 자연미를 돋보이게 했다. 

상춘재 근처엔 조그마한 개울과 정자가 있다. 나무들이 울창하게 그늘져 있어 정자에 앉으면 바람이 불지 않아도 시원했다. 이곳에선 청와대를 방문한 시민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서울시 금천구에서 친구들과 청와대를 방문한 김지영(79) 씨는 “해외도 많이 가봤지만 대통령의 공간을 와보고 누릴 수 있는 건 흔치 않은 기회”라며 “내부 관람이 가능해지면 다시 올 계획”이라고 밝혔다. 성남시 분당구에서 가족과 함께 청와대를 방문한 A(35)씨 또한 “청와대를 직접 둘러보니 그 규모와 크기가 조선시대 궁궐 같았다”며 “휴양을 하기에는 좋은 장소지만 소통하고 통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고 청와대 개방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상춘재에서 더 아래로 내려가자 토기와를 얹은 춘추관이 나타난다. 1990년 완공된 춘추관은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곳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역사 기록과 실록 편찬을 담당하던 춘추관에서 이름을 따왔다. 들어가 보고 싶은 장소였지만 정문인 춘추문이 잠겨있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후 춘추관 옆 샛길에서 다시금 바코드를 찍고 나가며 1시간의 청와대 관람을 마무리했다.

청와대는 네이버, 카카오톡, 토스를 통해 신청하고 추첨을 통해 선정되면 관람할 수 있다. 정부는 오는 22일까지 청와대를 개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급증하는 수요에 맞춰 다음 달 11일까지로 개방 기간을 연장했고 민간업체 위탁을 통한 상설 개방도 검토 중이다. 대통령부로 기능해온 청와대가 새로운 관광지로 안착할 수 있을지 관심이 주목된다. 


글·사진_ 임호연 수습기자 
2022630019@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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