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시대] 우리대학 옛 수학여행

‘수학여행’이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설렌다.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대학의 전신인 경성공립농업학교(이하 경농)에서도 수학여행이 존재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그때의 수학여행은 조선인을 식민 통치에 순응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 1935년 만주 여순 지역을 관광하는 경농 학생들
▲ 1935년 만주 여순 지역을 관광하는 경농 학생들
▲ 1936년 일본 천황탑 앞에 모여있는 경농 학생들
▲ 1936년 일본 천황탑 앞에 모여있는 경농 학생들

경농 학생들은 국내, 만주,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3학년 이하 학생은 수원, 개성, 금강산으로, 4학년 이상 학생은 만주와 일본으로 떠났다. 장소 선정에도 일본의 숨은 의도가 존재했다. 수원, 개성과 금강산은 일본이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철도를 만들면서 관광지가 된 곳이었다. 일본은 위 지역으로 학생들을 보내 숙박과 철도사업으로 수입을 올렸다. 

만주 지역을 선택했던 이유는 만주의 가난하고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며 상대적으로 일본군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경농 학생들은 동선당, 포벽산장 같은 일본이 만주에 진출한 후 세운 기관과 러일전쟁과 청일전쟁 당시의 전투 현장에 다녀왔다. 동선당은 고아와 사생아 등을 수용하는 기관이고 포벽산장은 중국 노동자의 집단 수용소다. 

이곳에서는 불쌍하고 궁핍한 중국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만주사변 때 일본군이 점령했던 장소인 북대영 등에 방문해 일본군의 강한 군사력을 보여줬다. 당시 교지였던 「경농」에 실린 만주 수학여행기에는 “항일정책을 편 중국 정치가 장쉐량의 운명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비참함뿐이었다”며 “마을은 현명한 제군들(일본)의 머리에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적혀있다.

일본을 방문한 학생들은 주로 근대시설과 천황 관련 유적지를 다녀왔다. 일본의 의도는 선진문물을 알림으로써 조선인에게 열등감을 심는 것이었다. 경농 학생들은 공원, 신문사, 시청, 중앙 우체국 등을 견학하며 발전된 근대 문명에 놀라워했다. 또한 천황이 사는 도쿄궁성에 궁성요배를 했고 야스쿠니 신사나 로기 신사 등 전쟁 주동자를 영웅으로 기리는 신사에 참배하기도 했다. 황국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주입하려는 목적이었다. 

「경농」의 일본 수학여행기에는 “신전에 공손히 예를 갖춘 우리 일행은 충성스러운 황국 청년이 됐으며 무궁한 황실의 운을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것을 맹세했다”고 기록돼 있다. 수학여행을 통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빼앗으려 했던 일본의 전략은 치밀했다. 특히 경농은 식민 교육의 중심부인 경성에 위치해 황국신민교육에 쉽게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MT를 많이 떠나는 시기인 요즘, 우리대학 수학여행의 아픈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조은정 수습기자 choej8191@uos.ac.kr 
사진출처_ 「1930년대 경성공립농업학교의 수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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