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응노 탄생 100주년 기념전‘다시 고암을 생각한다’에 다녀왔다. 붓과 먹, 종이를 가지고 만든 작품은 동양적인 느낌을 많이 담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하면서도 강했고 우울하지만 아름다웠다. 1945년 해방 전후의 작품들은 그 이후의 작품보다 한층 더 짙은 색채와 선명한 채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의 작품보다 훨씬 더 밝은 색깔을 가지고 있지만 수감 중에 제작된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필자는 슬퍼서 웃는 고암을 보았다.

“나는 동양화의 선, 한자나 한글의 선, 삶과 움직임에서 출발하여 공간 구성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나의 화풍을 발전시켰습니다. 한국의 민족성은 특이합니다.

즉, 소박·깨끗·고상하면서 세련된 율동과 기백이 있습니다. 이 같은 나의 민족관에서 특히 유럽을 제압하는 기백을 표현하는 것이 나의 그림입니다.” 이 말은 이응노 화백이 살아있을 때 어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실제로 이응노 화백은 동양,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파리 미술관 안에 동양 미술학교를 세워 많은 유럽인들에게 동양 미술을 가르쳤던 것, 사군자를 배운 것을 바탕으로 서예가 가지고 있는 조형에 기반을 두고 현대화한 문자추상을 탐구했다는 점 등에서 그의 민족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응노 화백은 1967년 동베를린 공작단사건으로 귀국해 감옥 생활을 했고 1977년 또 한 번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면서 1989년까지 국내활동이 모두 금지됐었다. 그리고 결국 그는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한다.

우리나라는 이응노 화백의 ‘사상’을 문제삼아 이 땅에서 쫓아낸다. 공산주의적 성향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는다. 작곡가는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무용가는 춤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처럼 화가는 그림으로 자신을 내보인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이응노 화백의 작품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아무런 사상 문제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조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는 동양적인 색채와 도구를 한 순간도 작품에서 놓아본 적이 없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이응노 화백의 진한 애국심을 느꼈다면 필자의 지나친 생각일까.

전시회장의 마지막 방은 ‘군상연작: 자유, 염원, 통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여러 가지의 군상이라는 작품을 선보인다. 어떤 작품 속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어떤 작품 속에는 한 사람만이 들어가 있다. 이응노 화백은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남과 북 상관없이 하나가 되는 세상을 꿈꿨을 것이다. 아직도 그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가 남긴 몇몇 작품만이 쓸쓸히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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