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읽어드립니다 -「이기대, 「세종시의 지역 정체성과 세종의 인문정신」, 『한국학연구』, 2016

세종시의 탄생 과정은 세종이 왕에 오른 상황과 닮아있습니다. 세종은 왕이 될 운명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은 첫째아들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으나 계속된 부자 갈등으로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인 충녕대군을 급히 세자로 책봉합니다. 충녕대군은 왕이 될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세자가 된 후 52일 만에 왕위에 올랐으나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인 세종대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세종시도 이와 비슷한 배경을 가집니다. 본래 충청남도 연기군이었던 세종시는 국민투표를 통해 ‘세종’이란 지명을 갖고 행정도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 세종시 캐릭터 젊은세종 ‘충녕’(출처: 세종시)
▲ 세종시 캐릭터 젊은세종 ‘충녕’(출처: 세종시)

다만 세종시는 계획도시이기에 지역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고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지금도 지역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세종시 내 주요시설 명칭을 순우리말로 제정하거나 세종축제를 진행하는 등 세종과의 연관성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만들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으나 다른 도시와 구별된 세종시만의 특징은 아직까지 뚜렷하지 못한 형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종대왕과 세종시의 연관성을 형성하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서 ‘세종의 인문정신을 구현한 도시’라는 주제의  논문이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이기대 교수의 <세종시의 지역 정체성과 세종의 인문정신>입니다. 이 교수는 세종이 우리에게 기억될 수 있었던 이유로 인문정신을 꼽았습니다. 그는 세종시도 세종의 인문정신을 계승해 지역 정체성을 만든다면 세종처럼 오랜 세월 기억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논문에 등장하는 세종의 인문정신을 세종 대의 일화로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이조판서인 허조가 종묘 제사관을 맡아 제사를 지내고 나오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조선에서 종묘제례는 왕실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에 작은 실수도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세종은 원칙과 달리 허조가 다치지 않았을까 염려하고 계단의 폭을 넓히라 지시했습니다. 개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문제 원인에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또한 세금과 관련해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하자 백성들이 어떤 제도를 좋아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시행했습니다. 조사를 반영해 토지의 질과 그해 생산량에 따라 세금을 차별적으로 거두는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을 시행합니다. 현대에도 정책에 대한 국민의 생각을 듣기 위해 여론조사를 시행하지만 세종의 여론조사는 지금보다도 광범위했습니다. 세종은 공감과 실천정신으로 백성들의 처지를 살피고 해결책을 구체적으로 마련했습니다.

두 번째 일화로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신하를 가혹하게 다룬 이야기가 나와 눈길을 끕니다. 세종 4년 1월 1일 개기일식이 예상돼 천문관이 중국의 역법에 따라 개기일식 시간을 계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국과 한국의 역법이 달라 예측은 빗나갔고 세종은 잘못 예측한 천문관에게 곤장을 치라는 벌을 내렸습니다. 세종이 천문관을 엄격히 대한 것은 역법의 문제가 백성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세종은 우리의 역법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을 연구한 뒤 세종 24년 『칠정산』을 완성합니다. 『칠정산』은 한양에서의 관측에 따라 편찬된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서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1년을 365일 5시간 48분 45초로 계산하는데 현대의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로 1초의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당시 역법을 계산하는 일은 중국만 할 수 있었습니다. 세종은 조선의 하늘과 역법은 중국의 것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천문에서 그치지 않고 문화, 음악, 문자 등도 중국과 다르다고 인식해 우리 음악을 담을 수 있는 악보인 정간보, 우리말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자인 훈민정음 창제까지 이어졌습니다. 다름에 대한 인식과 창조 정신은 우리만의 문화를 추구했던 세종의 인문정신입니다. 논문에서는 세종시 역시 세종이 독자적인 문화를 추구했듯이 다른 도시를 모방하는 게 아닌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세종은 소외된 사람들을 주목받게 하고 미래를 내다봤습니다. 주목받지 못한 관리였던 김종서를 요직에 등용했습니다. 김종서는 이후 4군 6진을 개척하며 한국사에 있어 마지막 북방 개척을 성공시킵니다. 장영실은 노비 신분이었지만 능력을 중시했던 세종에게 발탁돼 지금까지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세종은 인재를 뽑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집현전에서 군사, 지리, 의약, 언어 등 다양한 학문적인 논의를 하는 경연을 주최해 미래 국가를 짊어질 젊은 학자들을 양성했습니다. 논문은 세종시 역시 모든 주민이 주체가 돼 기존 주민과 이주 주민이 힘을 합쳐 도시에 필요한 정책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종시는 신생 도시로서 갖는 도시 정체성을 만들어야 하며 기존 지역의 정체성을 통합해야 합니다. 논문은 기존 주민과 새로운 주민이 통합해 필요한 정책을 만들어 나가는 도시가 앞으로 세종시의 과제라고 역설합니다.  세종의 인문정신이 세종시의 정체성으로 깃들면서 세종시 역시 지금의 세종대왕처럼 기억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엿보입니다.


최수빈 기자 csb@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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