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 신도시’ 세종특별자치시(이하 세종시)가 출범한 지 이번해로 10주년을 맞았다. 세종시는 인구 38만 명의 도시로, 충청권의 중심부에 위치해 청주시와 공주시, 대전광역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세종시는 ‘한국판 워싱턴 D.C.’를 목표로 45개의 중앙행정기관과 소속기관들이 있으며 15개의 정부출연기관, 추가 이전한 9개의 공공기관이 있다.

 

▲ 백지계획에서 행정수도의 모습. 중앙청이 들어설 직사각형 중심지구(세종시 장군면)의 양옆으로 주거지역인 동시(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와 서시(충청남도 공주시)가 배치돼 있다.(출처: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백지계획.제I부』)
▲ 백지계획에서 행정수도의 모습. 중앙청이 들어설 직사각형 중심지구(세종시 장군면)의 양옆으로 주거지역인 동시(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와 서시(충청남도 공주시)가 배치돼 있다.(출처: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백지계획.제I부』)

최초의 수도이전, ‘백지계획’

1964년 윤치영 서울시장은 국회에서 “서울시로 이사 오는 것을 허가제로 바꿔야 한다”라고 답변해 논란이 됐다. 이야기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많은 서울시민이 강북에 고립된 6·25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 상태에서 전쟁이 발생하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박 대통령은 안보문제와 서울 인구 과밀을 해결하기 위해 창원·안산 등의 신도시를 건설했다.

신도시 건설에도 불구하고 서울 인구가 계속 늘자 1978~1979년 사이 수도 이전 프로젝트 ‘백지계획’이 추진됐다. 백지계획에서의 백지는 모든 것이 미정인 상태에서의 이상 도시 건설과 현실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은 설계를 뜻한다. 백지계획 속 임시행정수도의 입지는 크게 두 원칙에 의해 정해졌다. 북한의 지상포 사정권 70km과 해상포 사정권 40km에서 벗어나야 했고, 서울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120~160km에 놓여야 했다. 두 차례의 선정 과정에서 현 세종시와 장군면 그리고 공주시 일부가 임시행정수도 입지로 결정됐다. 이후 구체적인 단계까지 진행됐던 백지계획은 1979년 박 대통령의 사망으로 무산됐다. 

백지계획은 우리나라 도시계획 역량을 총동원한 최초의 수도이전 시도였다. 계획에는 보행자 도로와 고속 전철 등 당시로서는 혁신에 가까운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지계획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을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임시행정수도는 이상 도시였고 1982~1986년 초기 5년간 건설 소요 자금은 1조 4046억원으로 전체 국가 예산의 31%에 달했다. 1979년 YH 여공 사건과 오일쇼크 그리고 한미관계의 위기를 겪던 박정희 정권에서 이를 마음 놓고 추진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당시의 평가다.

▲ 정부세종청사 전경(출처: 근현대사 아카이브)
▲ 정부세종청사 전경(출처: 근현대사 아카이브)
▲ 세종시 도시구조와 BRT 노선도(출처: 세종시)
▲ 세종시 도시구조와 BRT 노선도(출처: 세종시)

‘행정수도’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수도이전 계획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다. 이후 선거 기간 동안 충청권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으로 내세운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돼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했다. 행정수도의 위치는 2003년 국토교통부 등 8개 전문기관의 연구결과에 따라 현 세종시 위치로 정해졌다. 2004년 행정수도 건설의 법적 기반인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이 헌법재판소에서 ‘조선왕조 이래로 약 600년간 관습헌법 상 수도는 서울’이라는 이유로 위헌 판결을 받았다. 당시 판결은 성문법을 채택하는 우리나라 법체계에서 관습 헌법을 근거로 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는 점에서 논란이 됐다. 이제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 행정수도 명칭은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여야는 법적 근거를 잃은 행정수도를 대통령 집무실과 국회, 국방부와 외교부 등 일부 부처를 제외하는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대체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이하 위원회)’는 도시계획 공모전을 시행했고 당선작 중 고리 모양 선형 도시가 세종시 기본계획으로 계승됐다. 이 구조에서 시가지는 순환의 중심축을 따라 형성되고 대중교통은 중심축을 순환한다. 중앙행정, 교육과 의료 등 도시의 주요 기능은 총 6개의 권역으로 나눠 분산 배치됐다. 선형 도시 내부를 자연 상태로 보존하도록 했는데 이는 도심의 발달을 의도적으로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세종시는 좁은 시가지에 목표한 인구 50만을 수용하기 위해 고밀도로 개발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세종시는 친환경 도시를 목표로 중심축인 한누리대로에 BRT(간선급행버스체계)를 설치해 인구 대부분이 대중교통에 접근하기 용이하게 했고, 중심축 영향권 밖은 자전거와 대중교통을 통해 중심축과 간선망이 연결되도록 했다. 위원회는 서울에서 이전한 정부 부처를 집중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라 판단해 행정타운을 짓기로 했다. 이후 공모전을 거쳐 용 모양의 정부세종청사가 지어졌다.

어렵게 지어놓긴 했지만…불편한 세종시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12년부터 세종시에 사람과 기관이 입주하기 시작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불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부세종청사는 끝에서 끝까지 이동하는 데 20분이 소요되는 불규칙한 구조로 공간 효율성이 낮아 정부 부처는 민간 빌딩을 임차하고 있다. 경기대학교 도시·교통공학과 김진유 교수는 정부세종청사를 두고 “도시계획에서 정해진 도로 격자망을 완전히 무시한 건물”이라며 “건축가 마음대로 설계해 공무원이 사용하기 어려운 건물”이라며 비판했다.

교통 문제도 복합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김 교수는 “BRT를 이용하면 중심을 통과해 최단거리인 직선으로 갈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한편 BRT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입체교차로를 초기 계획에서 설정한 4개에서 10개 이상으로 늘리자 입체교차로 양옆에 놓인 차선이 줄어들어 교통정체로 이어졌다. 이 외에도 KTX 역인 오송역이 세종시와 20km 이상 떨어져 BRT를 이용할 경우 30분이 소요되고 택시를 이용하면 2만원의 요금이 발생한다. 김 교수는 “세종시는 위치를 정할 때는 정치인이, 세종시의 고리 모양 시가지는 건축가가 설계했다”며 “많은 부분에서 도시계획 전문가가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고 세종시 도시문제의 근원을 분석했다.

세종시는 수도권 인구 과밀 해소라는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강훈식 국회의원실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5년부터 5년간 세종시로 유입된 인구 중 60%가 충청권에서 발생했지만, 수도권으로부터 유입된 비율은 26%에 불과했다. 우리대학 도시행정학과 송영현 교수는 “세종시는 최근에 지어진 신도시로 우수한 인프라로 인해 개발이 완료되는 시점까지 충청권 구도심 인구가 유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시에 거주하는 기획재정부 주무관 김순옥 씨는 “고위 공무원은 대통령실과 국회 업무 보고를 위해 서울과 세종시를 자주 오가야 해 그대로 서울에 거주하는 경우가 있다”며 “자녀가 있는 공무원들도 자녀 교육 문제로 세종시에 정착하길 주저해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일자리 유치돼야 복합 도시 가능”

수도권 인구과밀 해소를 위해 세종시를 지역균형개발의 거점으로 삼겠다는 기조는 정권이 바뀐 상황에서도 공감대를 이어가며 추진되고 있다. 최근 대통령 세종집무실과 세종 국회의사당 분원 설치가 국회를 통과해 법적 효력을 얻게 됐다. 두 기관의 이전으로 세종시의 자치 분권과 행정 효율성이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세종시의 미래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자리와 교육을 강조한다. 송영현 교수는 “세종시는 초등학교가 잘돼 있지만 중·고등학교와 대학이 부족하다”며 “학생들이 세종시에서 성장해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교육 인프라 개선과 매력적인 일자리 유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진유 교수는 “공무원만으로는 도시 성장에 한계가 있어 양질의 기업이 유치돼야 진정한 복합 도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참고도서_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4』, 한울, 2003.
안건혁, 『분당에서 세종까지』, 한울아카데미, 2020.
김시덕, 『우리는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 포레스트북스, 2022.


최윤상 기자 uoschoi@uos.ac.kr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