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상 학술문화부장
최윤상 학술문화부장

지난 7월 창덕궁-종묘 관통 도로 ‘율곡로’를 지하화하고 녹지로 복원하는 사업이 12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완료됐다. 율곡로는 일제강점기 1932년에 ‘시구개수 제6호선’이라는 이름으로 종묘와 창덕궁 사이에 건설된 도로이다. ‘일제가 갈라놓은 창경궁-종묘 90년 만에 연결.’ 미디어와 서울시는 앞다투어 이 복원의 성과를 칭송했다. 창덕궁과 종묘가 조선왕조의 상징적인 장소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율곡로 복원이 일제가 단절시킨 ‘민족정기’를 회복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서울시는 공사의 이유를 ‘풍수단맥설’로 들었다. 우리의 사고체계에 기반해 생각해보면 조선과 일제와의 힘 대결에서 일제가 조선을 제압해 시구개수 제6호선을 건설했다는 점까지 가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대학 국사학과 염복규 교수에 의하면 당시 조선 순종은 율곡로 건설에 이례적으로 거부 의사를 냈다. 순종이 사망한 1926년 율곡로 건설이 개시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초기 식민지 조선인들은 이 공사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조선어 민간 신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왕실의 존엄’이 아닌 식민지 조선인과 내지인 사이에서의 ‘수익세’ 분담 문제였다. 세금 문제가 해결되자 ‘교통의 편리’라는 ‘근대적 가치’에 식민지 민중들은 큰 반대를 하지 않았다. 율곡로 건설은 ‘풍수단맥’이 아닌 격자형 도시 건설이라는 ‘도시개발’의 일부였다. 

심지어 최근 청와대 개방을 떠올리게 하는 경성시민을 위해 ‘종묘 공원화’가 필요하다는 사설이 지면에 등장하기도 했다. 율곡로 건설 과정을 보면 일제와 조선이라는 선악 구도로 평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일제의 도로 건설을 긍정한다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율곡로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지 전하고 싶은 교훈은 가치판단을 넘어 사건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는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번 율곡로 복원에 대해 매체를 가리지 않고 심층취재와 비판적 사고가 결여된 언론의 모습을 보고 아쉬움이 많았다. 학생 기자인 나조차도 2주라는 짧은 시간에 학술 기사를 쓸 때 관련 논문과 책을 읽고, 몇 분의 교수를 인터뷰해 기사를 작성한다. 대다수의 언론이 지자체의 ‘보도자료’를 받아 쓴 정도에밖에 미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율곡로 복원 사업은 ‘일제의 쇠말뚝, 민족정기 복원’처럼 한 줄로 요약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역사 중 특히 근현대 도시사에 관심이 많다보니 학술문화부 부장으로서 율곡로 복원의 이러한 다면적 양상을 심층적으로 다뤄보고 싶었다. 아이템으로 내기도 했지만, 학술면의 할당된 지면이 한 면이라 우선순위에 밀려 기사로 작성하지 못했다. 사람도 그렇고 어떤 사건도 한 줄로 정의될 수 없다. 최소한 내가 임기에 있는 한 서울시립대신문의 학술면은 사건의 단순한 요약을 넘어 사건의 본질에 다가감으로써 배움의 즐거움을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최윤상 학술문화부장 uoschoi@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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