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의 서재

소설 『해란강아 말하라』의 작가 김학철(1916-2001)은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現 보성고등학교)를 다니다가 1935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38년 중국 호북성 무한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에 입대한 김학철은 1941년 12월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다리에 총탄을 맞고 포로가 됐다. 일본으로 끌려간 그는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는데 그사이 총탄을 맞은 다리는 썩어들어갔다. 결국 다리를 잘라내어 일본 땅에 묻었고 이후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았다. 

1945년 10월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석방된 김학철은 서울에 와서 여러 작품을 창작하고 발표했다. 그 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했으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중국으로 피난해 그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중국에서 살았다. 1952년 10월 연변에 정착한 김학철은 이듬해 12월 장편소설인 『해란강아 말하라』를 탈고하고 1954년에는 총 3권으로 출간했다. 

그러나 1957년 중국에서 반우파투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김학철은 반동 문인으로 낙인찍혔고 그에 따라 소설 『해란강아 말하라』도 반동 작품으로 분류돼 잊혀져야 했다. 이후 김학철은 중국의 현실을 비판한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집필했다. 대약진운동과 모택동을 비난하고 풍자한 이 소설의 원고는 1966년 집을 습격한 홍위병들에게 발각되고 압류됐다. 이로 인해 김학철은 약 10년을 감옥에서 생활해야 했고 모택동 사후에야 석방됐다. 중국에서 금서가 된 『해란강아 말하라』는 1988년 한국의 풀빛출판사가 상·하 두 권으로 재편집해 출간함으로써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소설 『해란강아 말하라』는 1931년부터 1932년 연변에서 전개된 조선 농민들의 소작쟁의와 항일투쟁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소설 속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연변의 조선 농민들은 중국인들과 손잡고 1931년 가을 각지에서 지주들을 압박해 소작료 3:7제를 관철시킨다. 이듬해 봄에는 기민(饑民)투쟁을 일으켜 지주들을 압박해 받아낸 양식을 굶주리는 인민들에게 나눠줬다. 이에 대항해 지주들은 연변에 들어온 일본 군경으로부터 무기를 제공받아 무장자위단을 결성하고 농민들을 탄압했다. 반면 추수투쟁과 기민투쟁을 통해 단련되고 강력해진 농민들은 무장자위단에 맞서 지주나 공안기관을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해 무장 적위대(赤衛隊)를 결성했다.    

1932년 가을 일본 군경의 지원을 받는 친일 무장자위단이 해란강변에 위치한 버드나뭇골 주둔 적위대를 불시에 습격한다. 양측 간 전투에서 적위대는 패배하고 적위대 대장이자 소설 속 주인공인 임장검은 체포된다. 무장자위단장은 장검에게 군중들 앞에서 공산당이 나쁘다고 말해주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한다. 장검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죽음을 받아들인다. 한편 패배한 적위대의 나머지 대원들은 밀림 속 항일 근거지로 이동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우리는 소설 『해란강아 말하라』를 통해 연변에서 전개된 우리 조상들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 1920년 가을 연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워 이긴 청산리전투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청산리전투는 단기간에 끝났고 부대는 얼마 후 해산되고 만다. 

약 10년 후인 1931년 일본이 연변을 비롯한 만주를 대대적으로 침략해오면서 연변 내 조선인들은 일본에 반대하는 중국인들과 손을 잡고 항일무장부대인 동북항일연합군을 결성한다. 동북항일연합군은 이후 약 1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일본군과 싸운다. 소설 『해란강아 말하라』는 살길을 찾아 연변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이 1931년 이후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에 맞서 어떻게 각성하고 단결하며 무장해 나가는가를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제목| 해란강아 말하라
저자| 김학철
출판| 풀빛, 1988.
중앙도서관 청구기호| 813.6 김932ㅎ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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