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의 서재

오랜만에 회의자리에서 만난 김선생님이 인사를 건넨다. “아이고 박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아 네 김선생님 잘 지내시죠?”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하.” “하하하, 또 뵙겠습니다.” 멋쩍은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순간 의아한 기분이 든다. 

아니 평소에 별 연락도 없던 분을 수 개월만에 만나 안부를 물었는데 나 덕분에 잘 지내신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돌아서서 “그럴 리가 있나요?”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 그만둔다. 하지만 궁금한 기분이 든다. 사람들은 왜 저런 쓸데없는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걸까?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거나,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마치 연극을 하듯 상황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가며 사는 것일까?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은 『자아 연출의 사회학』에서 우리가 마치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연기자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모두 배우와 같이 상황에 맞는 배역을 가지고 있으며, 그 배역에 맞는 적절한 대사를 부여받는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 그 배역을 잘 수행하기 위해 무대 뒤에서 연습을 하고 의상과 분장을 준비한다. 연극에서 무대 위 자신의 배역을 잘 소화하는 배우에게 관객들이 찬사를 보내듯,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역할을 잘 수행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존경을 사고 부를 얻는다. 반대로 인생의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형편없는 연극배우가 관객들의 야유를 받듯, 사람들의 경멸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인생은 한 편의 연극과도 같다는 고프만의 생각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고프만이 보기에 실제의 연극과 인생의 연극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생의 연극에서는 배우가 관객이 되기도 하고 관객이 순식간에 배우가 되기도 하면서 서로의 연극을 관람한다는 점이다. 마치 수업을 하던 교수가 교단 아래로 내려오고 수업을 듣던 학생이 과제를 발표하는 상황처럼 언제나 상황이 뒤바뀌듯,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는 절대적인 관객이고 누구는 절대적인 배우가 될 수는 없다. 심지어 교수의 수업을 듣는 학생도 일방적으로 교수의 공연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이해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고, 지루한 하품을 참고, 실제로는 SNS를 하면서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열심히 노트필기를 하고 있는 척을 한다. 그러니 학생은 관객이면서도 또한 배우인 것이다. 결국 거대한 이 연극은 관객과 배우가 서로 얽힌 한판의 마당놀이와도 같은 것이다. 

이 거대한 연극은 혼자서 혹은 몇몇의 스태프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연극이다. 이 연극은 관객과 배우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도우며 협력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연극이며, 누군가가 “이것은 연극이다. 이것은 모두 가짜다!”라고 외치는 순간 판은 깨져 버리고 그 극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행동과 역할은 의미를 잃고 바보가 되고 만다. 이 연극은 망치기엔 너무 소중한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이 연극이 잘 이어져 가도록 각자의 노력을 한다. 그 노력이라는 것은 때로는 자신의 대사와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기도,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난감한 실수를 눈감아 주는 것, 교수님의 농담이 웃기지 않아도 웃어주는 것, 여차친구의 새로한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찬사를 보내는 것, 그리고 이 글 첫머리에 나온 모두가 아는 뻔한 거짓말로 상대방의 기분을 띄워주는 것들이 모두 포함된다. 우리 모두는 누구도 어색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이 연극의 분위기를 이끌어갈 책임과 동기가 있다. 

이런 의례(ritual)적인 행동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연기를 존중하고, 나의 연기를 존중받는다. 이를 통해 이 연극이 이루어지는 극장을 신성(sacred)시 하며 보호한다. 고프만이 보기에 이것이 바로 사회가 유지되는 힘이다. 서로 싸우고 반목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모두 일상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지탱하는 공모자인 셈이다. 


제목| 자아 연출의 사회학: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는가
저자| 어빙 고프만
출판| 현암사, 2016
중앙도서관 청구기호| 331.1 고643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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