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학과의 가장 큰 행사는 춘계와 추계 정기고적답사(이하 답사)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인해 수도권 지역의 유적지를 방문하는 소규모 답사만이 진행됐으나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로 이번학기에는 다시 대규모 답사가 추진됐다. 답사 코스는 역사적인 의미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 충청남도의 유적지로 구성됐다. 지난달 29일부터 3일간 진행됐으며 교수 4명과 학생 37명이 참여했다. 답사는 유적지에서 각 답사지 사전답사자료집을 작성한 학생의 발표 후 인솔 교수가 추가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기자도 답사에 참여해 생생한 역사를 학습했다. -편집자주-

▲ 정림사지 오층석탑 앞에서 국사학과 답사 참가자들
▲ 정림사지 오층석탑 앞에서 국사학과 답사 참가자들

1일차 근현대사의 흔적을 찾아

남연군묘, 명당과 험지 사이

학생들은 지난달 29일 오전 8시 설렘 반 긴장 반을 품고 출발했다. 처음으로 살펴볼 곳은 예산군에 위치한 남연군묘다. 남연군은 자신의 행적보다는 흥선대원군(이하 대원군)의 아버지라는 점과 1868년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 남연군묘에 대해 설명하는 김주영 답사부장
▲ 남연군묘에 대해 설명하는 김주영 답사부장

대원군은 권력을 잡기 전 풍수가에게 명당을 찾을 것을 부탁했다. 풍수가는 지금의 남연군묘를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로 지목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경기도 연천에 있었던 남연군묘는 1884년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이장됐다. 그러나 묫자리에는 고려시대부터 터를 잡았던 사찰인 가야사가 있었다. 대원군은 공주 마곡사의 승려를 동원해 가야사 승려를 쫓아내고 불을 질러 묘를 조성했다. 봉분의 자리에는 가야사의 탑이 있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서양 열강의 교역 요구와 천주교 포교를 수교 거부와 천주교 박해로 맞섰다. 독일 출신 상인 오페르트는 통상과 선교의 자유를 위한 협상카드로 남연군의 묘를 파헤쳤지만, 회곽이 두껍게 쌓여있어 도굴에 실패했다. 이후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해졌다. 본래 왕족이 아니었던 남연군은 사도세자의 아들 은산군의 양자로 들어가 왕족의 지위를 얻었다. 정조가 사망하고 세 명의 왕이 단명하면서 적통이 끊기자 대원군의 노력으로 고종이 1864년 왕위를 잇게 됐다. 고종을 대신해 국가를 통치한 대원군의 낮은 혈연적 권위는 남연군의 묘를 무리하게 이장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고 분석된다.

방문했을 당시 남연군묘는 봉분 아래의 언덕을 파헤치면서 가야사 발굴조사가 한창이었다. 다행히 좁은 길이 있어 무덤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직접 본 남연군묘는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따뜻한 볕이 잘 들어오는 명당이었다. 행운을 위해 아버지의 묘를 이장한 대원군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묘를 이장해 탄생한 2명의 황제는 열강 사이에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고종과 순종이었다. 개항기에는 독일 상인에게, 현재는 발굴조사를 위해 무덤 주변이 파헤쳐지기도 했다. 풍수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을 남연군묘를 보며 느꼈다.
 

▲ 백야사에서 방명록을 작성하는 학생들
▲ 백야사에서 방명록을 작성하는 학생들

김좌진 장군 생가지, 백야를 기억하다

첫 목적지였던 예산군을 떠나 김좌진 장군 생가지가 있는 홍성군으로 떠났다. 김좌진 장군 생가지는 터만 남아 있다가 1991년 성역화 작업을 통해 생가를 복원했다고 한다. 김좌진 장군은 일제의 무단통치를 피해 만주에 독립군 건설 운동을 벌여 북로군정서를 조직해 1920년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통념적으로 무장독립투쟁의 대척점에 교육을 통해 문화, 사회 수준을 올리는 실력양성운동이 위치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투쟁을 주도했던 김좌진 장군은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했고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실력양성운동에도 참여했다. 김좌진 장군의 행적에서 볼 수 있듯 독립운동에서 두 축은 구분되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독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한편 독립군의 활동이 만주 지역에 제한됐고 일제에 실질적인 피해를 주지 못했다는 회의적 주장도 있다. 그러나 독립전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문점이 해소된다. 독립군에게 무장투쟁은 일제와 직접 맞서 싸우기보다는 일제와 맞서 싸운 동맹국 위치에서, 세계적 시각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전쟁은 독립국가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김좌진 장군 생가지를 둘러보고 김좌진 장군의 호를 딴 사당인 백야사를 참배하며 다시 한번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겼다. 


2일차 웅진백제의 흔적을 찾아

2일 차 답사지역은 475년부터 538년까지 백제의 도읍으로 쓰인 웅진이 위치한 공주시다. 본래 백제의 수도는 현 서울시 송파구 풍납토성 일대였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아차산에서 개로왕이 살해당하고 급히 남쪽으로 내려와 도읍으로 자리 잡은 곳이 웅진이다. 안전한 곳에서 국력을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백제에게 방어에 유리한 웅진은 최선의 도읍지였다.
 

▲ 절묘한 위치에 있는 무령왕릉
▲ 절묘한 위치에 있는 무령왕릉

무령왕릉, 부흥기 백제를 떠올리다

두 번째 날의 첫 답사지는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이하 공주 왕릉원)으로, 위치한 곳의 지명을 따 ‘송산리 고분군’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차장에서 내려 공주 왕릉원까지 걸어가다 보니 약 1m 크기의 귀여운 동물 석상을 볼 수 있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유물인 진묘수를 본따 만든 석상으로 도교에서 무덤을 지키는 짐승이라고 한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공주 왕릉원을 걷다 보니 두 봉분 사이에  뜻밖의 위치에서 무령왕릉을 발견했다.

무령왕릉은 일제강점기까지 발견되지 않다가 1971년 공주 왕릉원의 배수로 건설 중 폭우가 내리면서 온전한 상태로 발견됐다. 현재는 유물의 배치 역시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 공유돼 발굴 현장을 꼼꼼히 기록하면서 수개월에 걸쳐 조사가 진행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인식이 부족해 무령왕릉 조사는 17시간 만에 끝났다.

성급한 발굴은 아쉬움을 남겼지만, 무령왕릉 발굴을 통해 귀중한 유물을 수습할 수 있었다. 묘비명을 적은 지석이 대표적이다. 무령왕릉 지석에는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이라는 사실이 적혀있어 백제시대 무덤 중 유일하게 무덤 주인이 확정됐다. 지석에 적힌 무령왕에 대한 정보는 『삼국사기』에 적힌 것과 일치해 『삼국사기』의 신뢰도를 높이는 자료로 작용했다. 또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 양나라의 영향을 받아 벽돌로 지어졌다. 백제는 남조와 적극적인 문화 교류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중흥을 노렸다. 보수적으로 여겨지는 장례문화에 타국의 문화를 받아들인 무령왕릉에서 백제의 국제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공주 왕릉원 옆에 위치한 국립공주박물관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공주박물관에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과 진묘수 그리고 장신구처럼 국보로 지정된 것이 많았다. 아름다운 유물은 우아한 백제의 문화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 미디어아트로 더욱 아름다웠던 공산성의 야경
▲ 미디어아트로 더욱 아름다웠던 공산성의 야경

공산성, 아름다운 야경과 함께

2일 차 일정이 예정보다 빨리 끝나 해가 지고 있던 오후 7시, 희망자에 한해 공산성을 방문했다. 공산성은 웅진도읍기 웅진성으로 불린 백제의 왕성이었다. 산에 위치해 가파르고 방어에 유리하지만, 공간이 협소해 당시 웅진성이 백제의 중심이었는가의 여부는 학자 간 의견이 갈리고 있다. 성곽을 15분 동안 걷다 보니 어느덧 금강과 공주시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공산성 아래에 넓게 펼쳐진 미디어아트 장식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알고 보니 지난달 17일부터 ‘공산성 미디어아트 백제연화Ⅱ’가 개최된 와중에 공산성을 방문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행운으로 아름다운 야경과 장식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한편 지난 2018년 공산성에서는 7세기 칠이 된 당나라 갑옷이 발견됐다. 직접적인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던 공산성에서 백제 멸망 전에 어떻게 당 유물이 발견될 수 있었는지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 점에 대해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고구려가 노획한 당 갑옷을 나당연합군에 맞서 연합했던 백제에 승리의 증표로 나눠준 것이 아닌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3일차 사비백제의 흔적을 찾아

마지막 답사지역은 성왕부터 멸망까지, 다시말해 538년부터 660년까지 도읍으로 삼았던 사비가 위치한 부여군이다. 웅진은 좁은 시가지로 도시 확장에 한계가 있어 백제의 중흥기를 이끈 성왕은 계획도시로 사비를 건설했다. 현재 부여군의 지명도 성왕이 538년 북방의 강국이었던 부여를 계승해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 데에서 유래됐다. 사비는 왕이 거처하는 도성뿐만 아니라 도성 전체를 둘러싼 외성이 존재한다. 이는 백제의 앞선 두 도읍인 한성과 웅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사비만의 특징이다. 

정림사지, 멸망 직후 백제를 만나다

부여에서의 첫 번째 유적지로 사비성의 중심 사찰이자 멸망 직후 백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정림사지를 방문했다. 정림사란 이름은 1942년 발굴조사에서 고려 현종 19년(1028)을 뜻하는 ‘태평 8년 무진 정림사’라고 새겨진 기와를 수습하면서 처음 확인됐다. 백제시대에 이 절이 정림사라고 불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발굴조사를 통해 이 절이 사비로 천도한 후 창건된 사찰이라는 견해는 입증됐다.

정림사지에 입장하는 순간 커다란 정림사지 오층석탑(이하 오층석탑)이 눈을 사로잡았다. 오층석탑은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단 2기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 탑이다. 목탑과 같이 큰 크기와 목재에서 주로 사용되는 배흘림 기법 등 목재 건축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아 재료가 목재에서 석재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만들어졌다고 유추할 수 있다.

오층석탑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에 감탄하면서 탑 1층을 유심히 감상하니 글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흔적은 당의 장수인 소정방의 주도하에 전승 기념비로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이하 비명)’이다. 비명에는 당 편향적인 시선으로 당이 백제를 침략하기까지 과정과 백제 멸망 이후 처리 방안이 담겨있다. 비명은 660년 백제 멸망 직후 한 달 사이에 쓰였다. 시간적인 한계로 돌을 캐 비석을 만들기 어려워 사비성의 상징적 구조물인 오층석탑에 글을 적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한다. 700년간 이 땅을 지배했던 백제와 바다 건너 백제를 침공한 당의 대군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당시 역사를 증언하는 오층석탑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 부여 왕릉원을 촬영하는 박준형 교수
▲ 부여 왕릉원을 촬영하는 박준형 교수

부여 왕릉원, 신성함과 웅장함

아쉬움 반 후련함 반을 품고 마지막 답사지인 부여 왕릉원으로 향했다. 부여 왕릉원은 사비도읍기 백제 왕릉 묘역으로 지명을 따 ‘능산리 고분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앞서 방문한 정림사지는 부여군 읍내에 있어 접근성이 좋았지만 부여 왕릉원은 부여군 읍내를 벗어나야 도착할 수 있었다. 사비도읍기 부여 왕릉원은 외성 밖에 위치했다. 전국시대 이후 중국은 주거지와 왕릉을 구분해 도성 밖에 왕릉을 조성했다. 그 영향이 계획도시로 건설된 사비에 영향을 미쳤다. 부여 왕릉원 주변은 논밭뿐이었는데 사람들과 떨어진 왕릉은 오히려 신성함을 더했다.

부여 왕릉원은 중앙고분군, 동고분군, 서고분군 크게 3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서고분군은 비교적 최근에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부여 왕릉원의 서쪽에는 부여 왕릉원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 능산리사지가 발견됐다. 능산리사지는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주차장을 건설하다가 발견됐다. 특히 1993년 능산리사지 발굴조사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기도 했다. 부여 왕릉원에는 큰 아크릴판을 설치해 과거 능산리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했다. 삼국시대의 사찰은 종교 시설을 넘어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였다. 아크릴판에 비친 능산리사의 모습은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백제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2박 3일간 답사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답사 코스를 기획한 국사학과 김주영 답사부장은 “교수님들께서 강의에서 강조하시던 역사의 현장성, 그리고 ‘공간’이라는 콘텍스트로 역사를 독해하는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며 “긴 공백을 끝내고 처음 딛은 발자국이지만, 계속 쌓이고 쌓여서 국사학과만의 길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전했다. 답사에 참여한 국사학과 학과장 박준형 교수 역시 “예산 문제로 답사를 가는 것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며 “학생회가 잘 준비해 준 덕분에 즐거운 답사가 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최윤상 기자 uoschoi@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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