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에 대한 리뷰 SI:REVIEW

기록의 역사는 아주 길게 이어져 왔다. 최초의 기록은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로 오랫동안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상을 남겨왔다. 기자는 어릴 적 누군가의 삶을 관조하는 걸 좋아했다. 집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발견한 부모님의 연애편지부터 엄마의 오래된 일기장과 육아일기까지. 내가 모르는 시간의 한 자락을 몰래 엿보는 건 왠지 모르게 비밀스러웠고 짜릿했다. 

남의 이야기도 이렇게 아기자기한데, 내 이야기면 얼마나 더 사랑스러울까? 그래서 꾸준히 일기를 썼다. 남겨온 삶의 조각을 탐미할 날을 기다리며 말이다. 일기를 쓴다고 해서 형식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친구와 싸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던 날, 온 가족이 함께 본 영화 티켓, 특별한 순간까지 지나온 날들을 종이 위에 고스란히 박제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을 채우다 보면 1년 단위로 묵직한 일기장이 쌓인다. 

<해리포터>에는 ‘호크룩스’가 나온다. 최종 빌런 볼드모트가 영생을 얻기 위해 제 육신을 7개로 나눠 담아 둔 물건이다. 생각해보면 일기장도 호크룩스가 아닐까. 육신이 사라져도 일기는 남아 그때의 우리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간 기자는 호크룩스를 찾아 책상 서랍을 열었다. 어두운 서랍 속에는 손때 묻은 일기장이 가득했다. 
 

▲ 초등학생 시절의 충효일기와 반성문
▲ 초등학생 시절의 충효일기와 반성문

초등학생 시절의 빛바랜 파란색 충효일기*에는 정돈되지 않은 글씨체로 처음 스파게티를 먹은 날과 반성문, 바다에 간 일이 쓰여 있었다. 지금은 별 감흥을 주지 못하는 일이 8살의 나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 중고등학생 시절의 다짐이 가득한 일기
▲ 중고등학생 시절의 다짐이 가득한 일기

중학생 시절의 일기는 응원했던 연예인의 이야기와 교우관계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무작정 스티커와 마스킹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이고 좋아하는 것에 충실했던 시간이 그리워졌다. 고3 시절의 일기는 예쁘게 꾸미기보다 시험 후기와 대학 진학을 걱정하는 탄식들이 나열돼 있었다. 지금은 지나간 일일 뿐인데 책장을 넘겼다는 이유만으로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익숙하고도 낯선 기분이었다. 
 

▲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둔 스무 살의 일기장
▲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둔 스무 살의 일기장

지난 1월 설레는 마음으로 고른 스무 살의 다이어리에는 좋아하는 영화와 시, 꿈꾸던 서울에서 겪은 변화와 향수에 대한 글로 가득하다. Y2K라고 불리는 2000년대 감성에 푹 빠진 탓에 곳곳을 돌아다니며 찍은 스티커 사진도 빼곡히 다이어리 사이사이를 부풀리고 있다. 모아둔 일기를 한 권씩 읽으며 생각하는 방식도, 좋아하는 것들도, 주위 환경도 끊임없이 변했지만 나 또한 성장했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 시작되는 12월이다. 이번해는 끝나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쳇바퀴 굴리듯 비슷한 일상이라 하더라도 몇 년 후에 보면 낯설고 또 귀여운 날들이 우리의 인생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연말에는 지나온 날들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더 빛나는 나로 거듭나기 위해 새로운 일기장을 사러 서점에 가 보는 건 어떨까? 뭐라도 좋다. 좋아하는 것 무엇이든 종이 위에 붙잡아 두자. 시간은 그렇게 야속하지 않으니. 

*충효일기: 경상남도 지역의 초등학생이 사용하는 일기장 


신연경 기자 yeonk486@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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