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장군.’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열린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특별전은 위와 같이 리차드 위트컴 장군을 소개했다.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었던 위트컴 장군은 1953년 부산역 화재 당시 군수품을 풀어 구호에 나섰다. 그는 보육원 설립을 위해 직접 한복을 입고 모금 운동을 벌이는 등 물심양면 한국을 도왔다. 전쟁의 폐허에서 위트컴 장군이 쌓아 올린 한국과 미국의 우애는 70년의 세월 동안 기술, 문화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됐다. 물보다 깊고 피보다 진했던 한미동맹의 면면을 살펴보자.
 

70년 한미동맹의 면면,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파월국군, 원조되는 밀가루, 골든글로브를 수상한 영화 ‘미나리’, 유인 우주 탐사 프로젝트 아르테미스 계획(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플러스, 한국문화원)
70년 한미동맹의 면면,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파월국군, 원조되는 밀가루, 골든글로브를 수상한 영화 ‘미나리’, 유인 우주 탐사 프로젝트 아르테미스 계획(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플러스, 한국문화원)

군정에서 상호방위조약까지

미국과 한국은 군정의 주체와 객체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미국은 하지 중장이 이끄는 제24군단을 보내 38선 이남을 통치하게 했다. 당시에는 소련을 견제하고 국제연합(UN)이 주도하는 신탁통치와 총선거를 위한 일시적인 파병이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을 우려했고 추가적인 미군 주둔에 소극적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미군정은 종결됐고 미군도 1949년 전원 철수했다.

양국 관계는 한국전쟁으로 반전을 맞았다. 미국은 UN군을 창설해 구원에 나섰고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작전통제권을 한국에게 양도받았다. 상호방위조약 체결도 전쟁 속에서 이뤄졌다. 미국의 군사·안보적 필요성과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 반대운동 결과 1953년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 속칭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6개 조항으로 구성됐으며 주한미군을 주둔시키고 유사시 미국이 한국에 개입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유사 상황은 북한 외에도 제3국이나 무장·테러단체 등 다양한 충돌 상황에 대응하고자 태평양 지역에서의 무력 공격을 포괄한다. 다만 개입에 미국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전쟁 시 자동 개입하는 미국과 유럽 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는 차이가 있다. 조약 기간은 무기한이지만 한미 중 일방이 타국에 통고하면 1년 후 중지할 수 있도록 했다.

피와 밀가루의 동맹

냉전과 분단이라는 시대 상황에서 초기 한미동맹은 주한미군을 중심으로 한 군사적 성격이 강했다. 주한미군이 주둔한 용산기지는 미국법과 행정이 적용되는 ‘작은 미국’이었다. 주한미군에 대한 공격은 미국 본토 공격을 의미했기에 당시 북한은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무장공비 침투 등 제한적인 대남 도발만을 벌여야 했다. 한미동맹은 남북 충돌 시 갈등을 완화하기도 했다. 1968년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한국이 대북 보복을 계획하자 1억 달러를 특별원조해 무력 사용을 중단시켰다. 

한국 역시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진영인 제1세계 안보 수호에 참여했다. 1965년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은 의료단을 시작으로 남베트남에 육군과 해병대를 파병했다. 1973년까지 8년간 한국군은 누계 30만 명을 파견했고 그중 2.6%인 1만 5천 명이 죽거나 다친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은 이후에도 걸프 전쟁에서 의료지원단을, 이라크 전쟁에는 치안 유지와 재건을 위한 자이툰 부대를 파병해 미국을 지원했다.

경제 원조는 주한미군과 함께 한미동맹의 한 축을 담당했다. 산업 시설 상당수가 전쟁으로 소실된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는 한국 경제를 안정시키고 성장시켰다. 제분과 제당, 면방직 공업을 이르는 삼백산업 역시 밀가루와 설탕 같은 미국이 지원한 원재료에 기초했다. 군비와 소비재 중심으로 이뤄지던 경제 원조는 1970년대 한국 사회가 안정되고 산업구조가 중공업으로 재편되며 차관 지원으로 전환됐다. 

다만 미국의 원조가 이촌향도 현상을 가속화하고 한국 농촌에는 부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시각도 있다. 성신여대 사학과 홍석률 교수는 “미국의 값싼 농산물 수입은 국내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이어졌다”며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고 젊은 인재가 유출되며 농촌은 도시에 대한 경쟁력을 상실했다”고 설명했다.

일방 지원에서 양자 교류로

일방적이고 안보·경제 중심이었던 한미동맹은 최근 상호 협력적인 기술 교류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 지난 2021년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유인 달 탐사 프로젝트인 아르테미스 계획에 참여했다. 화성 등 심우주 탐사를 목표로 하는 가운데 한국은 다음 해 달로 발사될 미국 발사체에 실릴 달 우주 환경 모니터를 제작하고 있다. 

반대로 국내 달 탐사선인 다누리에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개발한 정밀카메라가 사용돼 관찰 임무를 지원 중이다. 지난해 12월에는 한국이 미국, 대만, 일본이 참여한 반도체 협력 기구 CHIP4에 메모리 반도체 생산을 발표하는 등 미래산업을 중심으로 협력이 확대되고 있다.

미국이 주도했던 문화 교류에서도 한국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주한미군에 대한 한국군의 파견 인력인 카투사(KATUSA)는 양국 문화가 교류하는 통로다. 1950년대 청바지와 스팸, 프로야구와 「플레이보이」 등 의식주부터 오락까지 다양한 문물이 주한미군을 통해 유입됐다. 용산기지 인근 이태원은 미국 군수품과 클럽 문화가 결합한 이색적인 공간으로 자리했다. 

최근에는 주한미군이 방언, 소주, 화장품 등 한국 문화를 체험하고 미국으로 전파하는 경향이 보인다. 평택 미군기지에서 카투사로 근무 중인 최지원(22) 씨는 “부산 출신 카투사들과 어울리던 미군 장병이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영남 방언으로 연설을 했다”라며 “고향 친구들이 좋아한다고 휴가 때 대선 소주를 10병씩 사 갔다”고 경험을 이야기했다.

내일도 ‘같이 갑시다’를 외치려면

70년 한미동맹은 앞으로도 유지될까. 최근 미중 대립이 격화되며 미국은 한일과 개별적으로 맺은 양자 동맹을 NATO 같은 집단안보체제로 개편하려 하고 있다. 일본의 재무장을 용인하고 한미일 해군 합동훈련을 진행하는 등 삼국 협력을 강화 중이지만 한국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홍석률 교수는 “냉전기 미국에 의한 보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한미·미일 동맹은 유럽과는 다르게 분명한 위계질서가 존재한다”고 밝히며 “미국이 한일 간 역사 합의를 종용하면 안보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더 큰 압력을 받게 된다”고 역설했다. 

1970년대 한국이 핵 개발을 시도하자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계획했던 것처럼 동맹일지라도 자국의 이익에 따라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맹국에만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게 아닌 자국의 이익과 미래를 위한 외교정책 설정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임호연 기자 
2022630019@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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