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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대한민국 윤석열 대통령과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발표 장소를 따 워싱턴 선언이라 불린 이번 합의는 북한의 핵 개발 억제와 함께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근거한 한반도 비핵화를 강조했다. 북한은 물론 한국의 핵 개발이나 전략핵 배치도 불가하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 제네바 합의문을 교환하는 미국 로버트 갈루치 특사와 북한 강석주 외무성 제1부부장
▲ 제네바 합의문을 교환하는 미국 로버트 갈루치 특사와 북한 강석주 외무성 제1부부장

핵 개발로 인한 한반도 내 위기로는 제1차 북핵 위기를 들 수 있다. 1993년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영변 원자로에서 원자폭탄 제조에 쓰이는 플루토늄 추출량이 북한이 제출한 것보다 많다는 정보를 접수했다. 당시 북한은 NPT에 가입하고 IAEA의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는 등 무기로서 핵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IAEA는 특별사찰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이를 거절, NPT를 탈퇴했다. 이어 한미연합훈련을 구실로 IAEA 탈퇴도 선언했다.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하겠다는 신호였다. 미국과 북한은 1년간 협상을 이어갔지만 1994년 3월 핵이 떨어지면 서울은 불바다가 되고 말 것이라는 북한 대표단의 발언으로 협상은 중단됐다.

북한의 연이은 돌발 행동에 한국은 전쟁 공포에 사로잡혔다. 조선일보는 제2차 한국전쟁 시나리오를 특집 기사로 내보냈고 방독면과 방공호를 확보하라며 문민정부를 압박했다. 마트와 식료품점, 주유소는 비상식량과 물품을 구비하려는 시민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미국은 군사행동까지 준비했다. 6월 14일 미국 국방부는 원자로가 위치한 영변 폭격 계획을 수립했다. 계획에는 한국 내 미국인을 전원 철수하고 미군 5만 명과 400대의 항공기로 북한을 선제타격하는 안도 포함돼 있었다. 북한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통보를 받은 김영삼 대통령은 2시간 동안 전화로 빌 클린턴 대통령을 진정시켜야 했다.

극한으로 치닫던 갈등을 푼 것은 당시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이던 김대중이었다. 저명한 정치인을 보내 타협안을 제시하라는 김대중의 제안을 수락한 미국은 6월 15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에 특사로 파견했다. 북한이 핵 개발을 중지하고 NPT에 복귀한다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지원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몇 차례의 조율 끝에 북미 양국은 10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미제네바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북한은 NPT에 복귀했으며 갈등의 원인이었던 IAEA 사찰도 수용했다. 

미국은 북한이 핵시설 해체로 영변 발전소를 중단할 동안 손실된 전기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 비용을 지원했다. 기간이 정해지지 않았던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 6월 13일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서 마주하며 성사됐다. 한반도가 전쟁의 위기 속에서 화합의 장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임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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