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하면서도 일상 속 빛을 담은 풍경화. 방 안에서 고독하게 햇빛을 바라보는 무표정한 여인.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단절과 고립, 소외의 정서가 만연한 현대인들의 고독을 상기시킨다. 고독이 일상화되는 시대 속에서 호퍼의 그림은 더욱 주목받고 있다. 국내 관객들도 지난달 20일부터 개최된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전시를 통해 호퍼가 평생 쏟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엿볼 수 있게 됐다.
 

▲ 호퍼의 ‘자화상’. 그는 어린시절부터 중절모를 즐겨썼다고 한다.
▲ 호퍼의 ‘자화상’. 그는 어린시절부터 중절모를 즐겨썼다고 한다.

도시의 화려함 속 고독을 담다

에드워드 호퍼는 20세기 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호퍼의 주 무대인 뉴욕은 화려한 소비문화의 중심으로 아름답고 격렬한 야경으로 대표된다. 하지만 빛은 어둠 속에서 돋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호퍼는 대도시의 일상생활 속 사람들의 소외에 주목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이것만으로 호퍼의 작품세계를 한정짓는다면 그의 작품세계의 단면만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호퍼는 뉴욕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정립해 나갔다. 파리를 여행하며 아름다운 센강을 그렸으며, 평생의 동반자 조세핀 호퍼와는 자동차로 미국을 횡단하며 자연공간을 담아내기도 했다.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는 앞서 언급한 호퍼의 예술세계를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전시다. 서울시립미술관과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협업을 통해 호퍼의 65년에 걸친 화업 속 그린 드로잉, 에칭, 유화, 수채화 등 작품 약 160점과 호퍼 아카이브 자료 약 110점을 3개 층에 나눠 전시했다.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진행된다. 관람료는 성인기준 1만 7천원이며 오는 8월 20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1921년 작 ‘밤의 그림자’
▲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1921년 작 ‘밤의 그림자’

가장 미국적인 작가의 유럽 기행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린 호퍼의 첫 대규모 개인전이었다. 그래서인지 전시가 개최되고 한 달이 지났음에도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한 사람들의 줄이 건물 밖까지 늘어섰다. 긴 인파를 뚫고 만나보게 된 전시는 특이하게 2층에서 시작된다. 전시장에 들어가자 모자를 쓴 호퍼의 자화상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단정한 옷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강렬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자화상’은 본격적으로 전시에 들어가기 전 관객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1882년 뉴욕주 근교의 나이액에서 태어난 호퍼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해 뉴욕미술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벽면에 나란히 놓인 인체 스케치들을 감상하니 어린 시절 예술가가 되기 위한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가장 미국적인 화가로 불리는 호퍼의 예술적 성숙은 다름 아닌 파리에서 시작됐다. 1906년 24살의 그에게 뉴욕은 끊임없는 도시화로 염증의 병폐를 겪는 곳이지만 파리는 옛 모습을 간직한 낭만의 공간이었다. 호퍼는 파리에서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센강과 루브르박물관, 노트르담 성당까지 파리를 담은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많아 반가웠다. 

호퍼는 이 장소들을 소재로 빛의 효과에 대해 눈을 뜨며, 화폭을 사선이나 평행으로 가르는 대범한 구도의 작품을 시도했다. 또 아침부터 밤까지 생동감 넘치는 파리지앵의 일상을 관찰한 경험은 실체적인 관찰에 기초해 기억과 상상력을 가미한 호퍼의 사실주의적 특성으로 본격화된다.

파리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뉴욕에 돌아온 호퍼는 생계를 위해 삽화가를 선택한다. 그런데도 예술가의 꿈을 놓지 않았던 호퍼는 1915년 에칭을 시도하며 1928년까지 약 70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뉴욕의 주택가와 고층 건물, 북적이는 번화가의 풍경을 생생하고 거칠게 표현했다. 

벽면을 따라 늘어선 에칭을 다가가서 보니 세심하게 그은 선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손바닥 크기의 작품 ‘밤의 그림자’는 고립 속에서 불빛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실제로 강한 대비로 깊은 그림자가 특징인 이 작품은 알프레도 히치콕의 영화 [39 계단]에서 오마주되기도 했다.

뉴욕에서의 호퍼의 모습은 3층에 위치한 유화 작품에서도 볼 수 있었다. 마천루와 센트럴파크, 퀸스버러 다리 등 뉴욕의 상징을 모호하고 적막하게 해석한 호퍼의 작품은 색다른 맛이 있었다. 뉴욕에서 그렸던 작품을 감상하다 기다렸던 테마인 ‘도시 속 고독’을 담은 작품도 찾을 수 있었다. 고층건물과 극장, 방안까지 공간은 달라도 도시의 화려함 속 인물들은 모두 고요하고 쓸쓸해 보인다.

대도시 속 작품의 색감이 연한 것에 비해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그린 풍경화는 상대적으로 색감과 표현이 강렬했다. 호퍼는 미국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많은 풍경을 남겼는데 특히 1910년대 뉴잉글랜드의 해안선을 주로 방문해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이곳은 개인적으로도 1923년 아내인 조세핀을 만난 의미있는 장소였다. 여기서 주로 그린 암석해안은 강렬한 색조 대비와 파도의 역동성으로 청량한 매력을 발산한다.
 

▲ ‘햇빛 속의 여인’과 조세핀을 그린 스케치들이 전시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 ‘햇빛 속의 여인’과 조세핀을 그린 스케치들이 전시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동반자

3층 관람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오니 전시의 마지막 공간인 ‘호퍼의 삶과 업’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가장 먼저 호퍼가 삽화가로 일하던 당시 작업물을 만나볼 수 있었다. 상업작가로 활동하던 당시 호퍼는 각종 광고 삽화와 잡지표지를 주로 그렸다. 날카롭게 대상을 표현한 이 시절 호퍼 작품은 뉴욕 사람들의 일상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벽을 따라 전시를 관람하니 호퍼 부부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상영 중이었다. 

다큐멘터리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호퍼 부부의 삶이 담긴 아카이브 섹션이 시작돼 부부가 함께 관람한 연극 티켓들과 창작 노트들을 볼 수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부인인 조세핀 호퍼는 촉망받는 화가로서 그의 경쟁자이자 평생의 조력자였다. 

사교적이고 예술계와 언론과도 친했던 조세핀이 없었다면 그의 작품이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호퍼는 말수가 적어 자신의 작품을 세세하게 입에 담지 않았다. 그래서 호퍼가 언급하지 않았던 작품의 세부사항을 조세핀이 기록한 장부는 그의 작품 생애에 대한 핵심적인 연구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1924년 결혼 후 호퍼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모두 조세핀이다. 둘은 다툼도 많았지만 문화예술의 취향을 공유하고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았다.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 ‘햇빛 속의 여인’이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작품 속 여인은 곧은 자세로 담배를 들고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 외로워 보이기도 하고 당당해 보이기도 한 여인의 모습에서 호퍼가 조세핀에 가진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며 관람을 마무리했다.


최윤상 기자 
uoschoi@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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