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사람 - 국사학과 신희권 교수

이번호에서는 광화문 역사 공간 복원을 주도하는 국사학과 신희권 교수를 만나봤다. 고고학을 전공한 신 교수는 송파구 풍납토성 발굴조사를 총괄해 왔고 최근에는 숭례문과 한양도성 발굴조사를 관장하며 조선시대 도시 역사 공간 복원에 힘쓰고 있다. 

지난달 25일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철도를 매설하며 철거된 광화문 월대가 약 100년 만에 빛을 봤다. 신 교수가 해당 소식을 월대 발굴 현장에서 설명한 뉴스 영상은 유튜브 조회수 총합 200만을 넘기며 큰 반향을 얻기도 했다. 광화문 월대의 의의부터 문화재를 둘러싼 각종 고견까지 신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국사학과 신희권 교수
국사학과 신희권 교수

고고학과 문화재학을 전공한 계기는

어릴적부터 옛것이나 미스터리에 관심이 많았다. 문헌을 바탕으로 하는 일반 역사학과 달리 고고학은 실제로 남아 있는 유적·유물을 발굴하며 역사적 의미를 찾아내는 학문이다. 그렇게 발굴한 고고학적 유산들을 연구하는 것이 문화재학이다. 기왕 역사를 연구하려면 직접 문화재를 다루는 쪽이 더 흥미롭다고 생각해 두 학문을 선택했고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문화재 복원 중 기억에 남는 일화는

복원을 위해 문화재 일부를 훼손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광화문 복원 도중 도로면 바로 밑에 있는 고종 시기 광화문 기초들을 들어내고 현대식 콘크리트 공법을 통해 기초를 튼튼하게 해야 했다. 그런데 처음 안전진단을 했을 때 고종 시기 광화문 기초는 물론 처음 경복궁을 만들었던 태조 시절 광화문 기초도 전부 들어내자는 의견이 있었다. 

전혀 동의할 수가 없었다. 이럴 거면 광화문 복원을 중단하는 게 옳지 않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다행히 연구 끝에 태조 때 기초는 남겨두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놓아도 광화문 복원이 가능하다는 안전진단 결과가 나왔다. 결국 고종 시기 광화문 기초는 사라졌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여전히 태조 때 기초 위에 서 있다.
 

출처: SBS
출처: SBS

광화문 월대의 용도와 그 의의는

월대는 문이나 궁궐 정전의 벽을 높게 보이기 위해서 만든 기단이다.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도 2단으로 높다란 월대가 있는데 그 위에 건물을 지으면 건물의 격이 훨씬 높아 보인다. 돈화문이나 방화문처럼 궁궐 정문에도 월대를 만들었는데 광화문 앞 월대는 도로가 놓이면서 문만 덩그러니 남았고 월대가 있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발굴 과정에서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길이 50m와 높이 30cm 규모의 월대를 함께 지었다는 사실과 그 기초들이 확인됐다.

월대는 건물의 격을 높게 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광화문 안팎의 연결고리 역할도 맡았다. 임금이 경복궁에서 행차하는 어가행렬을 하거나 입궐할 때는 월대를 거쳐야 했다. 마찬가지로 외국의 사신을 맞아들이거나 국가의 여러 행사를 벌일 때도 임금은 월대에서 의식을 거행하고 행사를 관람했다. 월대에서 임금이 의식을 거행하면 백성들은 임금을 바라보고 만날 수 있게 된다. 즉 월대는 일종의 다리이자 무대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일제가 매설한 전차선과 월대의 복원 방향은

식민 잔재 철폐와 근대 유산 보존 같은 상반된 가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전차선의 존재가 월대 복원에 기술적인 장애물로 기능하는지 여부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선로가 월대를 복원하는 데 장애가 된다면 선로 부분을 걷어내는 게 맞다. 일제강점기 선로가 근대의 식민 통치기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도 지당한 의견이다.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선로를 유지하고 복원할 수 있다면 상징적으로 남겨두는 것도 고려할 가치는 있다. 다만 그렇게 하면 돌 기단인 월대를 밟고 광화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선로가 원래 월대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두 공간을 적절히 조화시켜야 한다. 복원 기간도 더 소요되고 고려할 부분도 많아진다. 복원은 문화재청이 어떤 입장을 견지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풍납토성 발굴 과정은 어땠나

풍납토성 발굴 과정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풍납토성은 예전부터 중요시하고 보존하려 한 유적이 아니다. 1997년 송파구 풍납동 재개발 과정에서 유물이 발견됐다는 신고가 들어오며 세상에 알려졌다. 이웃한 아파트 단지는 다 완공이 됐지만 해당 아파트는 준공이 전면 불가해졌다. 

발굴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유적으로 인해서 재산권 손실을 보게 된 셈이다. 해당 주민들은 현재도 풍납토성 보존 포기를 주장하고 아파트를 짓자고 강하게 민원을 제기하고 있다.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2001년 이래 아파트 개발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보존과 개발이라는 갈등이 남아 있다.

문화재 보존 실태에 대해 아쉬운 점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너무나 많은 문화재가 사라졌다. 전국적으로 개발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문화재가 출토돼 보존하려면 개발을 못 하게 된다. 그러니 문화재는 개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사하고 없애야 하는 대상이 됐다. 

전국적으로 우리나라가 중요하다고 판단해 발굴한 유적들을 보존한 사례는 전체의 3%에 불과하다. 나머지 97%는 발굴보고서 하나만 남긴 채 전부 개발해 버렸다. 김포 장릉 아파트처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문화재 옆에 무분별하게 개발하는 장소가 전국적으로 한두 군데가 아니다. 

앞으로의 연구 목표는

백제와 조선시대 서울을 모두 연구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과거 서울의 역사는 조선시대 600년으로만 국한돼왔다. 그랬던 서울이 백제를 시작으로 하는 2천년 역사 도시로 확장된 계기가 풍납토성 발굴이다. 앞으로도 위 연구를 이어나가 서울이라는 도시의 콘텐츠와 브랜드 파워를 조금 더 강하게 만들고 싶다. 또한 풍납토성이나 한양도성 같은 유적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서울을 세계적으로도 많이 알리고자 한다.

문화재 분야 진로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문화를 향유하려는 욕구는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이다. 학예연구사나 박물관 큐레이터 같은 직종에 대한 수요도 증가할 것이기에 유망한 진로 분야다. 고고학은 발굴 작업을 수반하다 보니 책상에서 책이랑 컴퓨터로 연구하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밝히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전하고 싶다.


임호연 기자 
2022630019@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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