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의 서재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입시와 취업을 준비하는 많은 사람에게 ‘자소서’ 작성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자소서’에는 작성자의 인생과 성격,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정보들이 담겨 있다. 

해방 직후 북한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자소서’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북한 정권이 공직자, 당 간부, 대학 교수와 학생, 중학교 교사, 군인 등 다양한 구성원들에게 ‘자소서’ 제출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 문서의 정식 명칭은 ‘자서전’이었다. 부모의 직업부터 재산 소유 정도와 출생지, 학력이나 외국 생활 경험 여부 등 수십 개 항목에 답해야 했던 이력서가 자서전과 짝을 이뤄 작성됐다. 자서전·이력서 내용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는 절차도 있었다. 각 기관 관리자가 기록한 평정서가 그것이다. 

이러한 자서전·이력서·평정서는 일반 대중의 생각과 삶을 생생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그간 북한사 연구가 대부분 『로동신문』으로 대표되는 공식 문헌, 즉 공간(公刊) 자료에 의존해 진행됐음을 상기하면 더더욱 그렇다. 검열과 여과의 과정을 거친 무미건조한 공식 문헌에 ‘보통 사람’의 목소리가 자리할 여지는 많지 않았다. 자서전·이력서·평정서 중 일부는 한국전쟁 중 북한을 점령한 미군에 의해 ‘노획’돼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에 소장돼 있다. 

오늘 소개할 『고백하는 사람들』은 바로 NARA에 소장된 자서전·이력서·평정서를 주요 사료로 해 1945년부터 1950년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북한 역사를 재구성한 책이다. 사료로 활용한 자서전·이력서는 879명분에 달한다. 지배층의 언어가 아닌 대중들의 일상 언어로 기록된 이 자료들은 당시 북한의 시대상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북한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북한사 영역에서도 ‘아래로부터의 역사’ 쓰기가 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책은 당시 북한 사람들의 자서전·이력서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자서전·이력서에 나타난 대중들의 경험을 하나하나 분해해, 해방 이후 북한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 –대중조직 건설 운동, 토지개혁, 일제 잔재 청산 등등- 아래 배치함으로써 연결성 있는 스토리로 엮어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는 북한 정권이 실시한 정책과 북한지도부의 국가건설 구상과 함께 그동안 ‘위로부터의 시선’에 의해 가려져 있었던 북한 역사의 이면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북한의 공식 문헌에서 소련군은 ‘해방군’으로서 북한 주민들의 환영을 받은 것으로 묘사돼 있지만, 이 책에 의하면 북한 사람들은 소련군에 대한 경계심을 좀처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특히 일부 소련군이 저지른 약탈과 성폭력은 주민들 사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소련군을 피해 피신하거나 그들에게 재산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했다. 북한 주민들에게 소련군은 ‘점령군’이기도 했다. 이처럼 이 책은 공식 문헌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북한 사회의 미세한 지점을 포착함으로써, 독자들이 격변기 북한 역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유려한 글쓰기와 쉬운 문체다. 저자는 자신의 또 다른 책(『북한 체제의 기원: 인민 위의 계급, 계급 위의 국가』, 역사비평사, 2018) 후기에서 학부 시절 소설가가 되겠다는 희망을 키우며 몇 년간 습작에 매달렸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러한 저자의 지난날 덕분에 독자들은 북한사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도 이 책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이후 북한에 사회주의 체제가 만들어져 가고 있던 초창기, 이름 없는 ‘보통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갔는지 궁금한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제목| 고백하는 사람들: 자서전과 이력서로 본 북한의 해방과 혁명, 1945~1950
저자| 김재웅
출판| 푸른역사
중앙도서관 청구기호| 911.07 김791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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