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유근(도행 G22)

초등학생 때는 사과가 참 어려웠다. 그 시절의 사과는 이랬다. 선생님이 두 아이를 마주 보게 하고 구체적인 문구를 알려주었다. “자, ‘유근아 미안해’하자”, “정근이가 미안하대”, “‘정근아 괜찮아 나도 미안해’ 하자”. 미안함을 온전히 느끼기도 전에, 잘못을 용서하기도 전에 소리 내 읊는 것이 그때의 사과였다. 

어릴수록 고집이 세다고 했던가. 초등학생의 목구멍에서 사과 한마디를 내뱉는 것은 마치 뜨거운 돌멩이를 삼키는 것같이 어려웠다. 내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되면 목구멍은 절대 열리지 않았고 어른들은 백기를 들었다. 그 나이의 그 견문으로는 그것이 ‘나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사과하지 않는 것’이 필승공식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른이 되자 사과가 쉬워졌다. 특히 아르바이트하며 사과의 레퍼토리는 다양해졌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유도 다양했다. 기다리게 해서, 번거롭게 해서, 불편하게 해서, 카드가 한도 초과라서. “죄송하지만 다른 카드 있으신가요?”라고 물으며 대체 내가 무엇에 왜 죄송해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되묻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사과하다 보니 어릴 적의 필승공식이 깨진 줄도 몰랐지만 나는 괜찮았다. 사과는 인정이다. 나의 잘못에 대한 인정. ‘잘한 것’에만 인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사과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사람을 만나는 데, 연을 이어가는 데 필수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지난 2월 개봉한 영화 <다음 소희>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소희가 콜센터에서 현장실습 하는 모습을 그린다. 처음 사회에 나와 기대에 부푼 소희의 기대와는 다르게 현실은 냉혹하고 아리기만 하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차가운 말에 소희는 안절부절못했고 그 모습에서 소싯적 ‘나’를 보기도 했다. 결국 수화기에선 사과를 들을 수 없었고 소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는 이 없었다.

우리 사회는 사과하는 사람만 늘 사과한다는 문제가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소시민들에게 사과가 흔해지는 동안 오히려 권력자들에게는 사과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는 점이다. 분열된 정치 환경 속 서민들의 피로는 쌓여만 간다. 끝없이 갑론을박하는 모습에, 혹은 분명한 잘못에도 사과 없이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 모습에 말이다.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은 사과받는 시민들은 되레 사과가 일상이라는 것이다. 혹자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넉넉히 갖고 사과가 필요한 때이다. 사과는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으려는 양보의 의미도 담고 있다. 상대와의 관계를 봉합하는 데 효과적이고 또 꽤 괜찮은 면피 수단이기도 하다. 사과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 사과를 계기로 앙금이나 섭섭함을 털고 새롭게 나아갈 수 있다.

다음 소희는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미안할 때 미안해할 줄 아는 사회가 돼야 할 것이다.

 

*독자여론은 신문사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울시립대신문사는 독자 여러분의 투고를 기다립니다.
신문사 홈페이지(http://press.uos.ac.kr)로 접속하세요.
글이 채택되신 분에게는 원고료를 드립니다.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