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대학 대학본부 앞과 중앙도서관 열람실에는 동상이 설치돼있다. 우리는 동상을 보면서 우리대학의 상징 동물인 ‘장산곶매’와 ‘대한민국 제1호 도시학자’인 故 손정목 명예교수를 기억할 수 있다. 과연 두 동상만이 전부일까. 경농관 앞 정원에는 경성공립농업학교(이하 경농) 시기 세워진 동상의 흔적이 남아있다. 동상의 주인공은 누구였으며 어떤 사연으로 현판마저 훼손된 채 대좌만 덩그러니 남게 됐을까.
 

▲ 땔 나무를 등에 지고 가면서 『대학』을 읽는 어린시절 니노미야의 동상(출처: 오다와라 관광청)
▲ 땔 나무를 등에 지고 가면서 『대학』을 읽는 어린시절 니노미야의 동상(출처: 오다와라 관광청)

소학교의 도덕 선생님 ‘니노미야 긴지로’

동상의 주인공은 1856년 사망한 일본의 농업계몽가 ‘니노미야 긴지로’(이하 니노미야)로, 경농에는 1940년 니노미야 동상이 세워졌다. 그는 어떤 인물이기에 바다 건너 식민지 조선에 동상으로 세워졌을까.

니노미야는 1787년 사가미 지방 가난한 농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에 부모를 잃어 큰아버지 밑에서 주경야독하며 살아갔다. 특히 이 시절 땔나무를 등에 지고 가면서 『대학』을 읽는 모습은 니노미야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다. 근면한 생활과 성실한 노동으로 니노미야는 유년 시절부터 비범함을 보이며 집안을 부양했다. 성년기에 들어서는 오다와라번의 핫토리 집안을 섬기는 하급무사로 활약해 핫토리 집안의 재정을 복원했다. 

이후 ‘보덕사상’이라 불리는 농촌정책으로 약 600개의 마을을 부흥시켰다. 보덕사상은 농민들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며 노동하고, 분수에 맞게 근검절약해 얻은 경제적 성취를 사회에 환원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에도막부는 부국안민을  실천한 니노미야의 성과를 인정해 관리로 임명했고 그는 막부의 명을 수행하다가 1856년 사망했다. 

농민의 삶을 개선한 니노미야의 보덕사상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다른 방향으로 해석됐다. 국부창출을 위한 노동력 동원과 국민의 교화원리로 변용된 것이다. 이후 1880년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적합하도록 존황사상과 신토주의가 첨가된 니노미야의 전기인 『보덕기』가 메이지 천황에 전달됐다. 메이지 천황은 『보덕기』의 교육적 가치에 감탄하며 이 책을 전국적으로 권장했고 니노미야는  교육에 이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소학교의 도덕교과서인 수신교과서에서 니노미야가 모범인물로 등장했다. 일제는 니노미야의 일화를 통해 근로를 이념화해 어린이와 노인에게서 최대한의 노동력을 창출하고자 했다.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일합병 전인 1907년 통감부 주도로 편찬된 수신교과서에서 그의 일화가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일제강점기 내내 빠지지 않고 수록됐다. 우리대학 국사학과 염복규 교수는 “니노미야는 근대적 농업으로 혁신을 거듭했으며 어려운 여건 속 학업과 연구를 이어가며 모범적인 인생을 살아 국가의 선택을 받았다”고 전했다.

모범적 삶의 상징이 된 니노미야는 일본 전역의 소학교에 동상으로도 세워졌다. 1910년 최초로 만들어진 니노미야 동상은 땔감을 지고 『대학』을 읽는 어린 시절 그의 모습을 모델로 제작됐다. 메이지 천황은 동상을 마음에 들어 해 구매했고 현재도 메이지 신궁에 동상이 전시돼 있다. 이어 1928년 고베의 시회의원이 쇼와 천황의 즉위대례를 기념해 니노미야 동상을 소학교 83개소에 기부하면서 일본 전역의 소학교에 퍼졌다.
 

▲ (시계방향으로) 1940년 니노미야 동상 제막식 현장. (출처: 경농 교지 『京農』). 현재 니노미야 동상 대좌의 모습
▲ (시계방향으로) 1940년 니노미야 동상 제막식 현장. (출처: 경농 교지 『京農』). 현재 니노미야 동상 대좌의 모습

망우리의 돌로 쌓아올린 대좌

경농을 연구한 서울역사편찬원 손용석 연구원에 따르면 니노미야 동상은 바다 건너 식민지 조선의 학교에도 세워졌다. 『문교의 조선(文敎の朝鮮)』에서 1935년 10월 우가키 총독이 니노미야 동상 건립식에서 축사했다는 기사가 존재하는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서기』 상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 즉위 2600년이 되는 1940년에 동상 설립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이는 우카기 총독의 농촌진흥운동과 농민에 대한 황국신민화 교육에서 니노미야가 모범인물화 된 것과 연관된다. 

경농에서도 진무 천황 즉위를 기념해 1940년 12월 7일 동상제막식이 열렸다. 동상은 니노미야 사상을 전파하는 단체인 조선보덕사의 상무인 고에즈카 쇼타에게 기증받았다. 명판은 당시 경기도 지사와 고에즈카 쇼타의 글씨를 받아서 제작됐다. 대좌는 경농 농업토목과 4, 5학년 학생들이 망우리 방면에서 채취한 석재로 세워졌다. 경농 학생들은 동상이 건립된 후 일과를 시작할 때면 동상에 목례하고 교실에 들어갔다. 염복규 교수는 “경농이 농업학교로서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 보여주는 의도로 니노미야 동상이 세워졌다”고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니노미야 동상 외에도 학교신사와 조선신궁에 제물로 바칠 쌀을 생산했던 ‘신찬답(神饌畓)’과 국기 게양대 등 일제의 산물들이 경농에 들어섰다. 현재는 모든 산물이 훼손됐지만 니노미야 동상 대좌만은 유일하게 남아있다. 동상 훼철의 이유를 확정할 만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이에 전시체제를 맞아 경농의 니노미야 동상이 공출됐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1941년 식민지 조선에서 「금속류회수령」이 공포되면서 학교에 세워진 동상을 국가에 헌납하는 움직임이 벌어졌다. 전국 학교에 세워진 니노야마 동상의 헌납을 독려하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한편 공출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가 해방 이후 한국인의 손에 동상이 훼철됐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시대에게 경농의 ‘유산’은  

니노미야 동상처럼 우리대학 인근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농의 흔적이 있을까. 경농관과 자작마루가 가장 뚜렷한 흔적이며 전농동 일대에 경농 시절 교수관사가 일부 남아있다. 염복규 교수는 “하늘못도 경농 시절 농업 실습지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들어진 저수지”라며 “넓게 보면 캠퍼스에 있는 수목들도 그 일부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우리대학 곳곳에 경농의 흔적이 남아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경농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염 교수는 “학교가 발전될수록 황국신민교육 강화 등 일제에 밀착된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염 교수는 ”학교의 통합 없이 한 자리에서만 계속해서 변화하며 역사를 이어간 대학은 우리대학이 거의 유일해 교사에서 경농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며 ”관제 농업학교로의 역사뿐만 아니라 소척대 사건이나 광주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한 설정석 시인처럼 독립운동의 역사도 함께 기억했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100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온 우리대학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최윤상 기자 
uoschoi@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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