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만남을 약속할 때 장소를 정한다. ‘어떤 것을 할지’보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를 먼저 정하는 것은 수 세기를 지나오며 인류가 지켜 온 순서다. 현대에는 기술의 발달로 메타버스나 화상 회의 플랫폼, 전화를 이용해서라도 교신할 수 있다. 

하지만 신세대 통신 기술이 발명되기 전, ‘만난다’는 말이 ‘대면한다’는 말과 뜻을 같이하던 시절이 있었다. 서울 시민들의 대표적인 약속 장소였던 종로의 중심에는 서울에서 대한민국의 서점 문화를 이끌었던 ‘종로서적’이 있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종로서적을 재현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그때 그 시절’의 향수를 느껴봤다.

우리가 만나던 그곳

종로구 우정국로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의 분관인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우리가 만나던 그곳, 종로서적’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중년부터 노년의 관람객이 저마다의 설렘을 안고 팸플릿을 손에 쥔다. 어떤 관객은 상기된 얼굴로 종로서적 내부의 사진들을 응시하고, 어떤 관객은 씁쓸한 표정으로 당시의 기사를 읽는다. 

종로서적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전시 팸플릿은 많은 사람이 오르내려 패인 계단, 새 교재를 사던 3층, 선물용 책과 문구를 고르던 추억이 있는 4층, 연인에게 선물할 시집을 사던 설렘이 담긴 6층을 차례로 묘사한다. 
 

▲ 종로서적 문학부 ‘금주의 베스트셀러’ 코너(1992년, 이철지 제공)
▲ 종로서적 문학부 ‘금주의 베스트셀러’ 코너(1992년, 이철지 제공)

해당 전시를 기획한 류위남 학예연구사는 “자료의 가치를 검토할 겨를 없이 빠르게 변화하는 문화 속에서 시간상으로 가까운 현대의 자료는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며 “가까운 시대였음에도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종로서적의 물질 자료의 부재”를 전시 과정의 어려움으로 꼽았다. 이어 “그럼에도 당시 종로서적에 종사하셨던 분들을 만나며 이야기와 소장 자료를 구할 수 있었다”며 “이번 전시는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소감을 전했다. 

종로서적이 최종 부도를 결정한 것은 2002년이다. 이번 전시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독자와 점원들이 소중하게 보관하던 당시의 자료들이 모여 6층이라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던 종로서적을 알차게 재현하고 있었다. 1970년대의 사보 겸 서평지로 유명했던 계간 『종로서적』 여러 권과 도서통신판매 안내문, 전 종로서적 이철지 사장이 기증한 1981년 12월 문화공보부에서 작성된 배포중지 국내도서 목록도 공개돼 있다. 

1980~90년에 사용되던 책 포장지와 종이봉투, 베스트셀러 목록도 당시 종로서적의 운영 시스템과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직원들의 월급 명세서와 종로서적 내부와 운영하던 점원들의 모습을 생생히 담은 사진들은 당시 출판부, 잡지부, 문학부 등 체계적으로 부서가 나뉘어 운영되던 종로서적의 시스템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종로서적에는 외국서적부가 있어 전문 지식인들의 발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문열, 이외수 등 유명 작가와의 [작가와의 대화] 강연부터 사인회까지 온갖 문화 행사의 플랫폼이기도 했다. 

종로서적과 한국 서점사를 조사한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용희 강사는 △체계적인 서점원 교육 △매장 배경음악과 책 포장지 사용 △독자 이벤트 등 여러 문화 사업과 체계적 경영 방식을 종로서적의 성공 배경으로 꼽았다. 그는 “종로서적은 독자들에게 서점을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닌, 다채로운 문화 예술적 경험을 향유하는 문화 공간으로 인식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격동의 한국 현대 서점사

종로서적이 위치하던 종로 2가와 종각 주변은 조선시대에 시전 등이 밀집했던 번화가였다. 근대기에 접어들며 박문서관, 영창서관 등의 서점과 출판사가 자리 잡았으며 이때부터 종로 일대는 한국 서점 및 출판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 책을 들고 가지 못한 탓에 서점가는 혼란을 맞는다. 피란 도시였던 대구와 부산에는 외국 잡지 등을 쌓아두고 파는 노점상이 유행했는데, 이는 1953년 동아일보의 「거리의 직업전선」 만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도매, 소매상 대신 월부와 외판원이 등장하며 시장 질서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 클래식이 흐르던 종로서적을 그리워하는 관람객의 메모
▲ 클래식이 흐르던 종로서적을 그리워하는 관람객의 메모

60년대 초에는 청계천 복개 공사 후 평화시장이 개설되며 고서들을 파는 헌책방 거리가 형성됐고, 대학천상가에도 상권이 형성되며 서적 도매 및 출판업이 발달했다. 60년대 말 종로 5가와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일대에는 많은 책을 싼값에 팔아버리는 덤핑 서점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기존 서점들은 월부, 외판원, 덤핑 서점과의 가격 경쟁에서 밀려나며 70년대 초까지 줄도산이 이어졌다. 1968년을 전후로 을유문화사, 덕흥서림, 영창서관 등 서울의 유서 깊은 서점뿐 아니라 지방의 주요 서점들도 문을 닫았다. 

하지만 1948년 대한기독교서회 건물 1층에 개관했던 종로서관을 전신으로 둔 종로서적은 이후 같은 자리에서 1963년에는 종로서적 센터로 확장하고, 1977년에 이르러서는 종로서적 주식회사로 출범하며 당대 3대 서점에 이름을 올렸다. 60년대 말부터 ‘책의 백화점’을 표방하며 점점 매장을 넓혀가 1979년에는 500평의 규모를 자랑하는 최초의 대형서점이 된 것이다. 

오프라인 서점, 지속될 수 있을까

1997년 종로서적과 교보문고, 영풍문고 등 대형서점들은 온라인 도서판매 서비스를 시작하며 ‘사이버 서점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하지만 경영 문제와 얽힌 종로서적은 2002년 최종 부도를 결정했다. 지방에서는 춘천의 데미안과 부산의 동보서적 등 역사가 오래된 대형서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으며 지난 2021년에는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에 이어 국내 대형서점 3위였던 반디앤루니스가 폐업했다. 

서점이 독서문화의 보루로서 책을 통한 지식과 교양의 확산에 이바지해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한국서점조합연합회의 「2022 한국서점편람」에 따르면 전국기초지방자치단체 중 7곳은 서점이 없고 29곳의 지역이 서점 멸종예정 지역으로 꼽히는 등 오프라인 서점의 소멸은 실제로 다가오고 있다. 

동보서적을 그리워하는 A(48) 씨는 “어릴 때부터 함께한 장소들이 문화적 변화에 밀려나 사라지는 것은 슬픈 일이다”라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이용희 강사는 “전통적 의미의 종이책 독자와 오프라인 서점의 문화적 위상이 약해진 것은 분명하다”며 “그럼에도 전자책과 오디오북 독자는 늘어나고 있고 감각적인 ‘독립서점’은 번성 중”이라고 변해가는 책의 개념과 서점의 기능에 대해 재고해야 함을 강조했다. 

공간에 대한 장소성*은 사람을 과거로 이끈다. 직접 책을 고르고 영수증을 적고 종이봉투에 포장해 서점을 나서던 아날로그 세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이들이 모인 종로의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책과 독자, 작가와 독자, 독자와 독자가 상호작용하던 종로서적의 흔적 위에서 앞으로의 서점과 독자의 역할에 대해 고심해야 할 시점이다. 


*장소성: 장소에 대한 개인적 집단적 체험이 모여 하나의 사회적 의미가 형성되는 것


신연경 기자 
yeonk496@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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