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의 서재

하라는 것 빼고는 다 재미있다

장면 1. 1981년. 고등학교 2학년인 전인한은 우리나라의 해방공간에 대한 대하소설 『지리산』을 꺼내 든다. 
장면 2. 1986년.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던 전인한은 미하일 숄로호프의 러시아 혁명기에 대한 대서사 『고요한 돈강』을 읽기 시작한다.
장면 3. 1987년. 대학원생이던 전인한은 우리나라 빨치산 문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태백산맥』을 읽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일제부터 육이오 끝까지의 시기, 프랑스 혁명기, 러시아의 1차 대전과 이후의 적백내전 시기 등의 격변기를 통상 해방공간이라고 한다. 이런 해방공간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는 넘친다. 그리고 읽어낼 수만 있다면 가슴 묵직한 보상을 선사한다. 정통문학이 아니더라도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오르페우스의 창』은 얼마나 많은 감수성 만땅 청소년들을 불면의 밤에 들게 했던가?

물론 필자의 해방공간 서사 읽기는 당장의 관점에서 보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행위다. 그러나 판단컨대 잃은 것은 없고 얻은 것은 많다. 기나긴 대하소설을 끝까지 읽어내는 뚝심, 눈앞보다 본원적인 것을 천착하는 용기/배짱 그리고 현실에서의 문학의 힘에 대한 확신을 얻었으니 말이다.

강이 바다를 만날 때

“이렇게 해서 그레고르가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몽상하던 일이 드디어 이렇게 실현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아들을 팔에 안고는 자신이 태어난 집의 문 앞에 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 남겨진 전부였다. 그것은 지금도 역시 그를 이 대지와 차가운 태양 밑에 빛나고 있는 거대한 세계로 이어주고 가깝게 해주고 있는 전부였던 것이다.”

발원지에서 시작하여 바다를 향할 때 강의 여정은 파란만장하다. 굽이지기도 할 것이고 격류로 변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드디어 바다에 다다랐을 때 강은 품을 한껏 넓힌 채 조용히 바다로 향한다. 그러나 바다 앞에서 잔잔하다 할지라도 강은 결코 자신의 여정을 잊지 않는다. 강의 도저함은 자신이 겪은 격변에 대한 관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대하소설의 마지막은 바다를 만나기 직전의 강과도 같다. 대하소설이라는 강의 긴 여정을 함께 해온 독자에게 대하소설의 마지막은 그 여행의 매조지를 통해 여행 전체를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1차 대전과 이후 적백 내전기에 돈강 코사크인 그레고르 멜로호프가 아크시냐와 파란만장한 사랑을 하면서 양심의 소리를 좇아 때로는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적군과 백군을 오가다 아크시냐를 잃고 결국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힌 채 처형당할 것을 알면서도 고향마을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통해 돈 코사크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그려내는 『고요한 돈강』의 흐름 자체는 다른 해방공간을 그린 문학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 소설만의 성취는 잔잔히 자신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며 고향마을과 아들을 바라보는 그레고르를 통해 대지와 가족에 대한 집요한 사랑을 보여주는 데서 찾아진다. 대지와 가족의 소중함을 굳건히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운명을 초래한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요체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들을 품에 안은 그레고르는 비극적인 자신의 운명이 아니라 대지를 그리고 가족을 본다. 조용한 밤 자신의 죽음 앞에서.     

지금 대하소설을 읽을 이유는?

없다. 당장의 앞만 보이는 사람들에겐. 그런데 말이다, 당장의 앞만 쫓으며 삶이 열어주는 다채로운 광경에 눈을 감기에는 이 삶이 아깝다. 그렇다면 『고요한 돈강』의 첫 장을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 읽다 던졌다 다시 집어 들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면서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드디어 이르렀을 때 그레고르처럼 조용히 대지와 가족을 그리고 자신을 관조하는 읽어 내버린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제목| 고요한 돈강
저자| 미하일 숄로호프
출판| 동서문화사
중앙도서관 청구기호| 892.8숄772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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