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의 서재

전농동과의 첫 인연은 1999년이었다. 대학에 갓 입학해 서울로 올라온 내게 전농동은 철거촌 현장으로 기억된다. 그때 보고 느꼈던 ‘가난’이 나의 것은 아니었지만, 또 남의 것만도 아니었던 것 같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지금은 어디인지 찾기 어려울 만큼 변했지만, 가난의 풍경에 대한 기억과 감정은 내게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실제로 빈곤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는 모두 어떻게든 빈곤과 연결된 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2019년 한 설문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나는 가난하다”고 응답할 정도로, 가난은 ‘리얼’하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자가 소유자고 대학 졸업자는 64.69%에 달하지만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20억짜리 집을 소유해도 ‘전형적인 하우스푸어에 중산층’이라 소개할 만큼, 나의 ‘진짜’ 가난이 다른 학생의 ‘가짜’ 가난에 도둑맞았다고 억울해할 만큼, 우리는 빈곤의 언저리에 여전히 서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을 자처하는 시대지만, 사회는 누가 빈자(貧者)인지를 가려내고 그의 빈곤을 처리하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빈곤 과정』은 바로 이런 담론과 제도, 감정으로 얽혀있는 빈곤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적어도 이 책에서 빈곤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즉, 빈곤을 정의하고 계량하여 빈자인지 아닌지를 가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빈곤이 구성되는 과정과 그 배치를 통해서 우리 삶의 취약성을 직시한다. 자원봉사자, 시민사회 활동가, 정책 실무자, 연구자, 예술가, 기자 등이 빈곤을 재현하는 동안, 정부도, 기업도, 대중도, 결국은 우리마저도 빈곤의 연결망에 복잡하게 연결돼 있다. 이 책의 곳곳에서 드러나는 ‘빈곤 과정’의 중층성과 복잡성은 독자들에게 공감과 불편함을, 통쾌함과 뜨끔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지 않고, 그대로 읽어낸다는 점이다. 저자는 한국과 중국의 빈곤 현장을 누비며 경험한 20여 년간의 인류학적 관찰을 촘촘히 엮어내면서, 빈곤을 다뤄왔던 기존 실천, 담론, 감정의 문제점과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저자는 ‘빈곤이란 무엇인가, 빈자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규범적인 답변을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돈 없고 집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돌봐줄 이도 없는 상태, 물질적 결핍과 경제적 고립, 약자, 피해자, 수급자, 의존자 따위의 전형적 분류로 답변해 왔던 이 질문에 간단히 답하기를 일부러 실패하고, 내려진 답을 거듭 번복하며 독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 과정에서 도시 빈민, 공장 노동자, 수급자, 불안한 청년, 농민공, 여성, 토착민, 노예, 역사 이전부터 착취당해 온 비인간에 이르기까지 빈자의 경계는 무너지고 외연은 끊임없이 확장된다.

높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는 ‘빈자’의 외연으로 끊임없이 포함되려는 강박에 시달린다. 당장의 생계를 걱정하지는 않더라도, ‘이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강박은 불평등의 경험, 인식, 감각의 엇박자 속에서 다양한 층위의 빈자를 출현시킨다. 책의 5~6장은 실존의 불안을 호소하는 청년들이 자원봉사자로서 글로벌 빈곤 퇴치의 책무를 자임하는 역설의 현장을 상세히 기술하면서 모순적이면서도 양가적일 수 있는 새로운 실천의 가능성 또한 여전히 열어놓는다. 

저자가 한국과 중국의 현장에서 목격한 불안의 가공할 힘은 빈자들 간의 불화나 적대를 부추기기도 하지만, 새로운 도발적인 문제 제기와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헛발질 속에서, 그동안 사회가 만들어 놓은 배치를 단순히 따라가기보다는, 함께 배치를 만들어 가는 정치적·윤리적 실천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빈곤이란 화두 앞에서 여전히 모순투성이로 살아간다. 가난과 결핍의 감각과 불안 속에서, 끊임없는 다양한 강박에 시달린다. 우리는 모두 여전히 빈곤과 함께 살아간다. 우리는 과연 빈곤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또는 빈곤을 어디로 가게 할 것인가? 이를 궁구(窮究)하는 과정에 많은 사람의 동참을 권한다. 


제목| 빈곤 과정
저자| 조문영
출판| 글항아리
중앙도서관 청구기호| 334.21 조681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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