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준(도사 23)

지난 8일부터 11일까지 우리대학과 서울시가 함께 주최한 ‘도시영화제’에 출품된 작품 중 하나인 [상실의 집]은 요양원에서 군복무를 마친 전진규 감독의 경험을 각색해 요양원의 노인들을 조명한다. 시간의 흐름에서 도태돼 버린 노인들의 아픔을 곁에서 바라본 감독의 시선을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적이고 감각적으로 묘사한 훌륭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내게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영화가 아닌 GV였다. 감독의 작품 해설과 인생관은 내게 수많은 감명을 준 훌륭한 연설이었다. 그중에서 “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는 감독의 말에 대한 나의 생각을 공유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이 글을 작성하게 됐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타인이 일순간 느낀 감정의 편린을 이해하는 것조차 그 사람이 자란 가정환경, 살면서 겪은 크고 작은 사건들, 그로 인해 만들어진 가치관, 그 사람의 기호나 트라우마 등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나와 다른 삶을 살아온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타인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기에 값지고 아름다운 일이다. 분명 우리는 삶 속에서 자주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한다. 또한 그런 노력은 종종 결실을 맺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아픔에 공감한다고 느끼는, 전혀 다른 두 삶의 궤적을 남겨온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인 두 사람이 통했다고 느끼는 기적 같은 순간이 온다.

하지만 그런 순간의 희열과 감동에 흔들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에 빠지면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 된다. 타인을 이해한다고 착각하면 조심성을 잃어 의도치 않게 타인의 아픔을 들쑤시거나 오해를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그 사람에 대한 관용을 상실한다. 타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역설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에 수용할 수 있다.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많은, 나와는 다른 사람이기에 그들의 기행에 대해 그 사람의 삶의 내력이 그런 행동과 사고를 강제했다고 생각하고 관용을 베풀 수 있다. 

나는 겪지 않았고 그들은 겪은 아픔이 있기에, 그러한 아픔을 난 절대 이해할 수 없기에 그들의 기행은 그럴 수 있는 일이 된다. 나 또한 그들의 삶을 살았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한다고 착각하면 그러한 가능성을 자의적으로 오판해버린다. 타인의 삶을 이해했다고 착각해버려 타인의 삶을 살았더라도 난 저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면, 그 사람의 기행은 수용 불가능한 잘못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불완전하고 결점투성이인 인간은 절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항상 겸손을 잃지 않고 타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서로를 용서하며 위로를 건네는 것이 인간이기에, 나는 충만한 인류애 안에서 인간을 예찬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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