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발생으로 중단된 우리대학 인문대학 대학혁신 인문고전기행 사업이 재개됐다. 국사학과는 고구려의 유적이 집중된 환인만족자치현과 집안시를 돌아보고 마무리로 선양시에서 요동의 종합적인 역사상을 경험하도록 답사를 구성했다. 답사는 지난 7일부터 4박 5일간 진행됐으며, 교수 3명과 대학원생 4명 그리고 사전에 『삼국지 동이전』을 강독한 학부생 12명이 참여했다. -편집자주-
 

▲ 고구려와 조선을 별개 표기한 박물관 지도
▲ 고구려와 조선을 별개 표기한 박물관 지도

1일 차 교묘해진 중국의 동북공정

2시간의 비행 끝에 내린 ‘선양시’는 한기가 셌다. 날씨는 영하 10도, 눈이 내렸는지 얼음 조각이 가득했다. 삼삼오오 모여 입김을 불어가며 첫 번째 답사지인 선양시 요녕성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요동 일대의 유물을 전시하는 요녕성박물관은 고조선부터 고구려 시기 청동기·철기와 거란, 여진 등 북방 민족의 유물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고구려를 정벌했던 위나라 무장 관구검의 행적을 다룬 ‘관구검기공비’ 역시 이곳에 전시 중이다.

고대사가 주력임에도 박물관은 중앙집권과 하나의 중국이라는 현대 중국의 사고에 기반해 전시를 구성했다. 3세기 위나라의 지배 이전까지 요녕성은 한족 왕조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세력이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각 전시관은 연도가 아닌 하, 상, 주 등 한(漢)족 왕조에 따라 분류됐다. 요동과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에서 고조선을 명시하지 않았고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기원전 108년을 시초로 명시해 한족 중심 역사관을 강조했다. 한족과는 별개로 고조선을 위시한 청동기 문화가 존재했다는 한국 고고학계와는 대비되는 관점이다.

고구려에 대해서도 중앙에 조공을 바치는 중국 내 지방정권으로 명시했다. 지도에는 현재의 국명과 국경이 기재됐고, 고구려는 한반도 밖에 있었으며 지배영역은 축소 표기됐다. 현재 동북공정은 실제 역사에서 자신이 원하는 부분을 끌고 오는 식으로 더욱 교묘해졌다. 박물관을 나온 후 여러 고구려 무덤을 방문했다. 보안을 명분으로 출입을 통제한 것이 다수였고 허락하더라도 촬영을 금지하거나 원거리 관람만 허용했다. 그 외에도 공안이 답사 버스를 따라다니기도 하면서 등 고구려 유적 관람, 연구를 통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 외곽 부분이 무너진 장군총의 모습
▲ 외곽 부분이 무너진 장군총의 모습

2일 차 능비와 왕묘를 둘러싼 진실게임

이틀 차 답사지는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이 위치한 ‘집안시’다. 버스로 1시간 30분을 이동하자 거대한 누각에 덮인 광개토왕릉비(이하 능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인 남성 키의 4배에 육박하는 능비는 고구려의 정통성과 아버지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고자 장수왕이 건립했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 관련 기사 등이 기록된 귀중한 고대 사료다.

능비는 고구려 멸망 후 장기간 방치돼 알아볼 수 없는 한자가 다수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 (고구려에) 조공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건너와 백제,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신묘년조 기사가 현재까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1880년 능비를 발견한 사카오 중위의 탁본을 바탕으로 일제는 신묘년조 기사가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인 정인보는 두 번째 문장의 중간에 주어로 고구려를 넣어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했다”로 해석했다. 그의 해석은 백제, 신라를 정복할 국력이 없었던 4세기 왜의 실상을 반영했지만, 한문 해석의 관점에서 일본 학계의 해석에 비해 어색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0년대에는 일제의 비문 조작설도 제기됐지만 현지조사 결과 거짓으로 판명났다. 

현재는 일본 학계의 해석 그대로를 인정하되, 고구려인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내용을 과장한 것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광개토왕의 업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구려는 과거부터 백제와 신라가 자신들의 영향력에 있었다는 서사를 형성하고자 했고, 그 질서를 위협하는 강대한 존재로 왜를 설정했다. 광개토왕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한 고구려의 정치적 목적이 왜를 강대한 세력으로 부풀린 신묘년조의 기록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능비 주변을 걷자 언덕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태왕릉이 보였다. 고구려의 무덤은 돌을 쌓아 올린 돌무지무덤이다. 높이가 점점 올라가자 붕괴를 막기 위해 큰 돌을 외곽에 둘러 마치 피라미드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태왕릉은 외곽 돌들이 무너져 첩첩이 쌓인 자갈들만 남았지만 인근 장군총은 그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군총 역시 붕괴가 진행 중이라 꼭대기 묘실을 가지는 못했다. 태왕릉과 장군총 모두 무덤의 주인은 불분명하다. 하지만 최근 중국은 학계의 통일된 견해가 형성되지 않았음에도, 무덤에서 ‘태왕’이라는 글자가 나온 점과 무덤의 크기를 고려해 각각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무덤이라 명시했다. 이에 대해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해 재위 대부분을 지냈는데 어째서 무덤은 국내성에 있냐는 비판이 나온다.
 

▲ 항미원조 구조물
▲ 항미원조 구조물

3일 차 향미원조의 강 너머 보이는 '사회주의 만세'

이틀째를 맞이한 집안시 답사는 이제 압록강을 향했다. 중간중간 마을에 내려 산성하, 만보정 고분군 등을 관람하니 어느새 커다란 다리가 나타났다. 중국 집안시와 북한 만포시를 잇는 조중철교였다. 다리와 촘촘한 철조망 넘어 붉은색으로 ‘사회주의 만세’라 적힌 북한의 선전 구호가 인상적이었다. 강 너머에는 주택이 간간이 보였다. 탈북이 용이한 환경상 국경에 거주하는 이들은 평양에 거주하는 이들 다음으로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철교 쪽으로 다가가자 항미원조 73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물들이 줄줄이 전시돼 있었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미국으로부터 조선을 도왔다는 의미로 항미원조라 부른다. 기념행사도 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이나 정전일인 7월 27일이 아닌 최초로 미군과 전투를 벌인 10월 25일 열린다. 당시 중국에게도 한국전쟁 개입은 거대한 도박이었다. 10년 넘게 이어진 전쟁과 내전으로 국토가 황폐해진 상황에서 군 수뇌부 대부분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꺼렸다. 마오쩌둥은 대만 침공을 포기하면서까지 30만 명의 대군을 1차 지원했다. 

그러면서도 명칭은 인민지원군으로 하면서 자원병 파견의 형식을 취해 전면전이라는 인식을 피하고자 했다. 인민지원군은 장진호 전투를 포함, 정전 시까지 공산군의 주력을 담당했다. 2000년 국방군사연구소의 『한국전쟁 피해 통계집』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을 포함해 최소 90만 명의 인민지원군이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중국도 자본주의 진영에 대한 완충지를 확보했고 반미의 선두자란 위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의 크나큰 비극이 도약의 기회가 된 아이러니에 씁쓸함을 느꼈다. 
 

▲ 멀리서부터 신성함이 느껴졌던 오녀산성
▲ 멀리서부터 신성함이 느껴졌던 오녀산성

4일 차 초기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서

이날의 첫 답사지는 ‘환인만족자치현’에 위치한 ‘오녀산성’이었다. 역사서와 설화에 따르면 주몽은 고구려를 세우고 이곳에 도읍했다. 화강암 절벽으로 둘러싸인 정상부가 보여주는 웅장함은 ‘천혜의 요새’라는 세간의 말을 납득시키기 충분했다.

오녀산성을 본격적으로 등반하기 전 오녀산성박물관에 들렀다. 민감한 주제가 담겼다는 이유로 박물관 측은 촬영 불가를 통보했다. 인류 공통이 공유해야 할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조치였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약 800m에 달하는 오녀산성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푸른 하늘 아래 산이 굽이굽이 흐르는 장관에 감동도 잠시, 999개의 계단을 올라야 오녀산성에 도착한다는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필 며칠 전 내린 눈이 계단 위에서 얼어 조심하며 계단을 올라야 했다.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아 팔로 무릎을 눌러가며 겨우 정상에 도착했다.

왜 이곳이 한 번도 점령당하지 않았던 곳인지 몸소 이해가 갔다. ‘사방을 둘러보면 끝없이 펼쳐지는 수해, 하나씩 자리 잡은 마을, 굽이치는 산길이 한눈에 들어온다’라는 안내판의 문구처럼 풍경은 아름다웠다. 고구려는 도읍으로 평시에 사용하는 평지성과 전쟁 시에 사용하는 산성 두 개의 도성을 운용했다. 환인 지역의 산성이 오녀산성이라는 것에 대다수 학자가 동의한다. 하지만 평지성이 어딘지는 아직 논란이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하고성자토성’ 과 평지성설의 근거로 사용되는 ‘상고성자고분군’이다. 상고성자고분군의 묘제와 고분군의 규모를 보아 이곳에 묻힌 사람들이 하고성자토성의 축조 및 주민들과 관련됐다는 학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설립 주체와 시기가 불분명하고 광개토대왕릉비에 나타난 평지성의 하고성자성의 방위와 달라 해당 견해는 비판받는다. 한편 문헌 기록과 부합하고 대규모 고분군이 발견됐다는 점에 ‘고력묘자촌고분군’이 평지성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이곳은 환인댐 건설로 수몰돼 정상적인 조사가 불가능한 상태다. 하고성자고분군은 울타리가 설치돼 있어 철조망 사이로 사진을 찍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 누르하치가 업무를 봤던 대정전에서 포즈를 취하는 기자들
▲ 누르하치가 업무를 봤던 대정전에서 포즈를 취하는 기자들

5일 차 과연 요동은 누구의 역사인가

길었던 4박 5일 답사의 마지막 날. 이날의 목적지는 1일 차에 방문했던 선양시다. 선양시는 고대부터 다양한 세력이 각축을 벌여왔던 요동의 중심지다. 선양시에 들어서자 버스 창가에 눈길이 절로 갔다. 대도시인 선양시는 부피감이 있으면서도 특색있는 빌딩과 청나라 시기 장대한 전통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선양이 문헌에서 최초로 확인된 것은 『한서』로 연구에 따르면 선양 일대에서는 전국시대부터 상당한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양은 요동의 종족들에게 패권을 상징했으며, 중원 세력에게는 동쪽 변경에 황제의 통치가 닿고 있음을 상징하는 도시였다. 

선양은 중원과 요동지역을 둘러싼 세력의 변화에 따라 소유 주체가 계속해서 바뀌었다. 후한 말 혼란 속에서 공손씨가 점유하던 요동은 통일왕조였던 위와 서진의 손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서진이 변경에 대한 통제력을 잃자 고구려와 선비족이 선양을 차지했다. 이후 당과 발해 그리고 요동에서 발흥한 이민족이 이 지역을 통치했다.

중원과는 독립된 역사를 가진 요동은 최근 중국 당국의 정책에 따라 역사의 재편집을 겪는 중이다. 이날의 첫 목적지인 선양박물관에서는 앞선 요녕성박물관과 유사하게 중원의 왕조 구분에 따라 요동의 역사를 전개했다. 과거부터 동북 3성이 중원의 관할 하에 있었다는 중국의 주장을 반영한 배치였다. 독자적인 요동의 역사가 중원의 역사에 편입되는 모습은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학의 격언을 새삼 떠올리게 했다.

원명 교체기를 지나 누르하치의 굴기에 힘입어 만주족은 요동에서 마지막으로 패권을 잡는다. 이때부터 요동을 ‘만주’라 부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답사지인 선양고궁은 1625년 누르하치가 선양으로 수도를 옮기며 축조한 궁궐이다. 선양고궁은 만주족의 건물 배치를 따르고 한족의 건축양식을 차용했다. 고궁 내 비문에 한자, 몽골문자, 만주문자가 나란히 적힌 모습에 국제도시로서의 선양의 국제성과 위엄이 느껴졌다. 토요일 북적이는 고궁 안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필기구와 수첩 등 다양한 굿즈를 가방에 담으며 긴 답사를 마무리했다.

요동은 다양한 민족들의 역사적 기반이었다. 해외답사는 국가와 민족에서 벗어나 한국사를 타자화해 바라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우리대학 국사학과 안정준 교수는 “중국이 과거 중국 지역에 있었던 모든 역사를 자기화시키는 것이 큰 문제인 것처럼 우리도 한반도에 일어난 모든 역사를 현재 우리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러한 시각에서 탈피하고 과거를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외국 문물을 자주 보면서 견문을 쌓는 게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어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접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여행의 선택지가 넓어진다”며 “이번 답사를 계기로 학생들이 관심사를 찾아 공부하고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임호연 객원기자 2022630019@uos.ac.kr
최윤상 객원기자 uoschoi@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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