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의 서재

내가 다니던 대학은 재학생 거의 대부분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고립된 공간이었다. 대학의 담장 밖으로는 서너 개의 만화방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만화를 읽고 싶은 만큼 맘껏 읽을 수 있는 그곳을 나와 친구는 아지트 삼아 나름의 달콤한 휴식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전공에 흥미를 붙이지 못하던 나는 대학에서 전공 서적보다도 양귀자, 박완서와 같은 한국 작가의 소설, 요시모토 바나나나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일본 작가의 책들에 빠져 살았다. 실제 소설을 써보겠다며 3학년 때는 단편소설 한 편을 써보곤 스스로 이 길은 아니구나 하고 그만둔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쓴 단편소설은 내 방 어딘가를 뒤지면 나오겠지만 지금은 차마 부끄러워서 읽어보지 못할 것 같다. 요즘 시대에는 만화방은 거의 대부분 사라졌을 것이며 웹툰이 대세라지만 나는 이제 만화에도 소설에도 흥미를 잃어버렸다. 대학 졸업 후나 교수가 된 후로는 자기계발서, 전공과 관련된 실용서나 전문 서적 위주로 편식 독서를 하고 있다. 

이런 나에게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할 책 한권을 추천해달라고 묻는다면, 독일의 작가 하이케 팔러가 글을 쓰고, 이탈리아의 일러스트레이터 발레리오 비달리가 삽화를 그린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100 인생 그림책』을 추천하고 싶다. 2019년 한 신문의 신간 추천글에서 우연히 책 소개를 읽고 나는 자녀와 함께 읽으면 좋겠다 싶어서 책을 주문했고, 실제로 책을 받아보곤 이 책은 어린이는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어른들의 그림책임을 깨달았다. 

그 후 가끔 책장에서 꺼내서 휘리릭 책장을 넘길 때면 때론 행복이, 때론 슬픔이 밀려온다. 아마도 이 책은 평생 나의 서가 한 구석에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온라인감상평을 읽어보면 평생 소장하고 싶다는 의견들이 다수 눈에 띄는 것을 보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독자들이 많은 것 같다. 이 책의 인기에 힘입어 하이케 팔러 작가와 발레리오 비달리 일러스트레이터가 올해 10월에 한국을 방문해 북콘서트를 진행했다고 하는데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이 책은 0부터 99라는 숫자까지 각 나이에 맞이하는 인생의 순간들을 그림과 한 줄의 글귀로 100가지 장면에 담아낸 그림책이다. 어떤 한 사람의 생애를 담은 것이 아니고,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여성이기도 하고 남성이기도 하며 다양한 인종이 등장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작가는 갓 태어난 조카를 보며 앞으로 조카의 미래에 펼쳐질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상상했고,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는 점들을 책에 담아내고 싶었다고 한다. 작가는 여러 지역에서 어린이부터 90세 이상의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나며 한 가지 공통된 질문을 했다고 한다. “살면서 무엇을 배우셨나요?” 작가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삶의 다채로운 이면들을 보게 됐고, 인생의 순간마다 마주하는 삶의 기쁨과 슬픔, 고민들을 책에 생생하고도 구체적으로 담았다. 

삽화와 함께 실린 글귀들은 실제 인터뷰한 사람들의 언어를 그대로 담았기 때문에 추상적이거나 공허하지 않고, 본인의 삶에서 있었던 기억을 소환한다. 하지만, 실제 자신의 나이보다 높은 숫자의 페이지들은 아직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49라는 숫자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밤새 한 번도 깨지 않고 잔다는 게 얼마나 호사를 누리는 일인지 배울 거야.” 내가 만약 20대나 30대에 읽었더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 같지만 지금은 누구보다도 공감이 가는 문구다. 

20대인 학생들은 이 책을 통해 부모님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우리 부모님이 나를 키우며 지나온 길이 어떠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또한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며 아주 좋을 때와 아주 나쁠 때의 가운데쯤에서 가장 잘 자란다는 메시지는 편안한 위안이 된다.


제목| 100 인생 그림책 
저자| 하이케 팔러
출판| 사계절
중앙도서관 청구기호| 853.6팔226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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