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

세계지도를 펼치면 대만과 일본 본토 사이 태평양으로 향하는 길목에 작은 섬이 보인다. 바로 일본의 섬 오키나와다. 오키나와는 일본 영토에 속하지만 일본 본토와 동떨어져 있다. 도쿄보다 서울이 오키나와에 약 300km 더 가까울 정도다. 

류큐 왕국: 만국진량의 나라

오키나와에는 독립 국가인 ‘류큐 왕국’이 존재했다. 류큐라는 국명은 7세기경 쓰인 중국의 사서 『수서』에서 오키나와에 대해 ‘류구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서 비롯됐다. 1429년 쇼우하시는 오키나와 전역을 제패하며 제1 쇼우씨 왕조를 열었다. 교역과 농업을 국가 경영 기본 사상으로 여긴 쇼우하시 왕은 명나라, 대월(베트남), 일본과의 교역에 주력했다. 철을 주로 매입해 농기구 제작에 힘을 보태며 농업 생산력을 늘렸다. 또한 왕권의 상징으로 왕성 ‘슈리성’을 축조했다. 

1469년 제1 쇼우씨 왕조 내의 실세 우치마 가나마루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제1 쇼우씨 왕조를 타도했다. 다음해 가나마루는 즉위한 뒤 스스로를 쇼우엔이라 칭하며 제2 쇼우씨 왕조를 세웠다. 쇼우엔의 뒤를 이은 쇼우신 왕은 1477년부터 1526년까지 50년간 오키나와를 통치하며 류큐 왕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쇼우신 왕은 지방의 호족인 아지들을 슈리로 집결시키고 중앙에서 직접 지방을 다스렸다. 명나라에 더 자주 조공을 바치며 친교를 다졌고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샴(태국) 등 먼 국가들과도 교역했다. 
 

▲ 만국진량의 종
▲ 만국진량의 종

이처럼 류큐 왕국은 무역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다. 류큐 왕국의 무역에 대한 자신감은 1458년 쇼우타이큐우 왕에 의해 주조된 ‘만국진량의 종’에 기록된 명문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오키나와현립 박물관에 전시된 만국진량의 종에는 용머리 모양을 한 손잡이가 달려있고 몸통 부분에 4경으로 나눠진 명문과 연꽃 문양이 그려져 있다. 명문의 1경에는 한문으로 “류큐 왕국은 남해의 승지에 위치해 삼한(한반도)의 빼어난 점을 모두 취하고, 대명(명나라)과 일역(일본)을 불가분의 관계로 삼아 상호의존하고 있다.
  
1609년 류큐 왕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던 사츠마 번*은 무력으로 류큐 왕국을 제압해 일본의 속국으로 삼았다. 1872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일환으로 류큐 왕국을 류큐 번으로 강등하고 국왕을 류큐 번왕으로 임명해 속령으로 편입했다. 이어 1879년 슈리성을 일본의 소유로 만들어 류큐 번을 없애고 번왕을 도쿄로 압송한 뒤 오키나와를 설치했다. 약 450년간 동아시아 해상을 누비던 류큐 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폭풍이 휩쓴 근현대의 오키나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일본과 미국은 태평양 전쟁을 벌였다. 오키나와에서는 태평양 전쟁 말기 대규모 지상전이 벌어졌다. 1945년 4월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해 약 50일간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뒤 오키나와를 점령함으로써 미군정 시대를 열었다. 전투 중 오키나와에서 징집된 약 3만 명의 군사와 일반 민간인 약 9만 4천 명이 희생됐다. 

1945년 미국은 애치슨 라인***에 오키나와를 포함해 오키나와의 군사 기지화를 시작했다. 미군은 군용지를 탈취하거나 부당한 임대 계약을 맺었다. 농민들의 저항에도 무장군인을 동원해 토지를 접수하기도 했다. 부당한 토지 탈취와 빈번한 미군의 범죄행위는 오키나와 주민들이 섬 전체 투쟁을 뜻하는 ‘시마구루미토소(島ぐるみ闘争)’에 돌입하는 계기가 됐다.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1960년 미일 간 안보 조약이 개정되며 일본 본토의 주일미군기지가 오키나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일본 전체 면적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 내에 주일미군기지의 절반 가까이가 주둔하게 된 것이다. 미군기지 증가와 함께 항공기 사고와 오염물질 발생이 늘어나자 오키나와를 일본으로 복귀시키자는 여론이 생기기 시작했다. 1965년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는 “오키나와 반환 없이 일본에 전후란 없다”고 말하며 오키나와 반환 협상을 시작했고, 1972년 5월 15일 미군정 27년 만에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돌아왔다.
 

▲ 지난 2019년 전소된 슈리성을 복원 중인 현장
▲ 지난 2019년 전소된 슈리성을 복원 중인 현장

오키나와는 현재까지도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다. 주일미군기지의 75%가 오키나와에 몰려있고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대형공군기지에서 발생하는 소음공해는 일상의 한 부분이 됐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한참 지나도 미군기지임을 표시하는 철책이 끝나지 않을 정도다. 최근에는 오키나와에서 두 번째로 큰 후텐마 주일미군기지 이전으로 오키나와현과 일본 정부가 충돌하고 있다.

오키나와는 츄라우미 수족관과 아메리칸 빌리지, 만좌모 등 화려한 관광지가 즐비한 최고의 휴양지 중 하나다. 하지만 그 뒤에는 알려지지 않은 오키나와만의 역사도 존재한다. 화재로 소실돼 재건 중인 슈리성, 오키나와현립 박물관, 전적 국립공원 등을 방문해 오키나와가 지나온 길을 직접 걸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번: 일본식 봉건제인 막번 체제에서 다이묘(영주)가 다스리던 영지
**메이지 유신: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왕정 복귀를 통한 중앙정부 체제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애치슨 라인: 1950년 1월 12일에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선언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


정재현 객원기자 
kai714@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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