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원 부국장
전혜원 부국장

강이나 바다의 바닥에서 오랫동안 갈리고 물에 씻겨 반질반질하게 된 돌을 사력(沙礫)이라고 부른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쓰는 힘이란 뜻의 사력(死力), 있는 힘을 다한다는 사력(肆力), 선비의 힘을 나타내는 사력(士力)과 소리가 같다. 기자는 뒤의 세 단어 모두 돌멩이 ‘사력’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물의 바닥에 가라앉아있던 거친 돌멩이는 아주 오랜 시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참아가며 마치 선비와 같이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살을 깎는 고통을 반복하면 거칠었던 돌은 결국 반질거리는 사력이 된다.

진부한 이야기겠지만 인간의 삶도 사력과 비슷하다. 타인을 대하는 법, 업무적 능력, 사고와 판단력 모두 사력을 다해 끝없이 물과 마찰해야 매끈해진다. 날것의 상태에서는 거친 말과 표현으로 타인과 갈등하고, 능력은 아직 미숙하기에 실수를 반복하고, 처음 겪는 상황에서 미흡한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여러 번 부딪히고, 갈리고, 깎이다 보면 마침내 유연하고 부드러워진다.

고난과 고통은 물밀듯 우리를 덮친다. 특히나 신문사가 그렇다. 각자의 이유로 신문사 문을 두드렸지만 예상치 못한 업무 강도와 일정에 지치고 꺾이기 마련이다. 첫 번째 사력(死力)이 필요한 순간이다. 버티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힘이 필요하다. 이것은 열정으로 드러난다. 인터뷰이를 컨택하는 것과 표기 원칙을 지켜가며 최선의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처음 신문을 쓰는 수습기자에게 목숨을 다하는 힘을 요한다. 
그렇게 한 차례 튀어나온 표면이 떨어져 나가면 두 번째 사력(肆力)이 필요하다. 신문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과로를 결심하며 한 차례의 신문을 발행해도 다음 발행일은 충전을 기다리지 않고 다가온다. 이때는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다해야 한다. 다행인 것은 이전에 다듬어졌기에 물에 쓸리는 아픔이 덜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문을 쓰다 보면 마지막 사력(士力)이 필요한 때가 온다. 유교가 제시하는 선비(士)는 어진 덕을 추구하는 인격체다. 과거에는 버텨나감, 혹은 나의 기사를 위해 기사를 썼다면 이제는 신문으로 어떠한 ‘어짊’을 추구할 것인가 고민한다. 거창한 것은 아니다. 기사를 통해 어떻게 공공의 이익을 추구할 것인가, 어떻게 새로 들어온 수습기자들에게 친절할 것인가 등 사소하지만 동력이 되는 것들이다.

신문사에서 갈려 나간 사력의 아픔은 누가 알아줄까. 역시나 진부하지만 사력의 아픔은 물뭍이 안다. 고난과 고통을 던졌던 물이 그가 얼마나 어렵게 상황을 극복했는지 인정하고 주변에 함께 있던 뭍이 그의 노고를 안다. 그러니 살아가며 너무 괴로워하고 자책하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이 얼마나 어렵게 그 자리를 버티며 얼마나 쓰라리게 성장했는지를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가장 분명히, 자기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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