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사람

이번호 ‘시대, 사람’에서는 우리대학에서 학부생 시절부터 석사, 박사 과정을 거쳐 현재는 전임교원으로 재직 중인 조경학과 한봉호 교수, 세무학과 정지선 교수, 국사학과 문미라 교수를 인터뷰했다. 선배님이자 교수님이 겪은 학생 시절 재미난 이야기부터 우리대학에 대한 깊은 애정, 앞으로의 찬란한 포부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조경학과 한봉호 교수(조경 87, 03년 임용)

학부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우리대학에 입학했던 1987년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그 당시 대학은 지금처럼 조용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TV와 신문에서만 봤던 일들이 서울에서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광장에 모여 학과별로 깃발을 들고 데모를 했다. 잔디밭에서 내일 데모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경찰의 가방 검문이 당연했고 최루탄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학교에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데모로 아수라장이 돼 공부하는 것도 상당히 힘들었다. 학부생 시절을 떠올리면 민주화를 갈망했던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연구 분야에 대한 애정도는 
‘조경’이라는 학문은 자연을 조성해 인간에게 쾌적한 환경 제공을 목표로 한다. 이 점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과거에는 현재와 달리 조경이 우리 사회에서 자리를 잡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경학 전문가가 되면 국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조경의 기반을 닦기 위해 노력했던 연구가 사회에서 많이 쓰이는 모습을 보며 더욱 힘내서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것 같다. 

애정하는 교수님이 있다면
지도교수님이었던 이경재 교수님이다. 대학원 진학 계기도 교수님 때문이었다. 전문가로서 사회 문제와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이런 모습이 정말 조경뿐만 아니라 각 분야의 모든 전문가들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했다. 사회의 나쁜 점을 고쳐나가고 순응하지 않는 자세 말이다. 교수님을 본받아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현재도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꿈을 크게 가졌으면 좋겠다. 나도 어렸을 때 어려움을 많이 겪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힘든 상황에서도 목표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열심히 살아가다 보니 결국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후배들도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지 말았으면 한다. 벽에 부딪히면 선배나 교수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면 된다.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그릇을 넓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세무학과 정지선 교수(세무 92, 11년 임용)

대학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좀 쫓겨서 살았던 것 같다. 제대 후에는 세무사 공부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아쉬운 기억도 많다.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했던 것이 가장 후회된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사람을 많이 만나보는 경험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시간 나면 여행도 다니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눈도 기르면 좋겠다. 대학 시절은 다시 오지 않으니까 말이다.

공부하기 싫은 순간이 있다면 어떻게 이겨내고 계신지
교수도 학생과 똑같다. 공부는 항상 하기 싫다. 진짜 공부하기 싫을 때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집중해서 임하는 것 같다. 이번 수업도 또 개강 시기가 닥쳐서 준비하고 있다. 대학원을 다닐 때는 술로 공부를 버텼는데 교수가 되니 그것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교수가 되기까지 걸어오신 길은
내가 공부할 때는 선배 대부분이 세무사 시험에 합격해 실무로 나간 상황이었다. 지금은 세무학과를 나와서 대학원을 졸업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때는 매우 드물었다. 세무학과 졸업생 중 학교에 남아 공부한 사람은 내가 거의 처음이었을 거다. 그 점이 힘들었던 것 같다.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학부생 시절에는 빨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해서 취업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대학원을 다니면서 바뀐 것 같다. 이미 세무사 자격증을 딴 상태로 석사에 입학했다. 주변의 모든 분이 개업을 하라고 말했는데, 딱 지도교수님 한 분만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싫은 소리도 해야 하는데 성격상 불가능하다며 공부나 더 하라고 하셨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이 이해가 안 갔는데 지나 보니 맞는 말 같다. 나는 교수가 천직이다.

앞으로 어떤 교수가 되고 싶은가 
학교를 다닐 때는 교수님이 마냥 어려운 분이라고만 생각했다. ‘애정’이란 표현을 쓰기도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를 지도해주셨던 김완석 교수님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도 12시에 주무시고 4시 반에 일어나셔서 책을 읽으시는 무서운 분이지만 학생들에게는 굉장히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여전히 닮고 싶고 따라가고 싶은 분이다. 그래서 나 또한 학생들과 친한 교수가 되고 싶다. 교수는 학생과 연결돼 있는 사람이다. 학생이 없으면 교수의 존재 이유도 없다. 학생이 언제든지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교수가 되고 싶다. 

 

국사학과 문미라 교수(국사 02, 23년 임용)

학부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국사학과의 꽃은 답사가 아닌가. 2002년에 대학을 와서 2학기 때 경주로 답사를 갔다. 둘째 날 일정표에는 ‘칠불암’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알고 보니 하루 종일 산을 타고 그곳의 유적을 보는 일정이었다. 지금은 상상이 안 되겠지만 그때는 야만의 시대였다. 산꼭대기까지 올라서 밥을 먹고 내려오던 도중, 전날 숙취와 겹쳐 나른해진 상태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산 돌부리에 허리를 박는 바람에 꼬리뼈가 부러져 회장 선배와 경주 시내의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던 슬픈 기억이 있다.

가장 좋아한 수업과 교수님은
현재 전공 한국 현대사와 민족 운동사 수업을 가장 좋아했다. 특히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님이셨던 염인호 교수님의 북한사 수업이 너무 재밌어서 전공도 이쪽으로 정하게 됐다. 모든 국사학과 교수님들을 좋아하지만 이익주 교수님과 배우성 교수님을 특히 애정한다. 20살에 대학에 입학했을 때부터 나를 봐오신 분들이다. 정말 스승님 같은 존재고 그런 스승님들과 함께 같은 국사학과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교수가 되기까지 걸어오신 길은
이른바 더 좋은 대학의 대학원으로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요즘에는 모교에서 석사와 박사까지 과정을 밟는 이가 드물다. 그런데 나는 학교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지도교수님과 학과의 선생님들이 정말 좋았다. 특히 우리 과는 정원이 적은 학과임에도 이전 시대의 교수님이 전부 계시다. 그래서 우리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대학이 대학원 장학금 제도가 잘 돼 있는 것도 크다. 박사 과정의 경우에는 공부만 할 수 있도록 전일제로 등록금을 전부 지원해주기에 박사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교수가 되기까지 힘들었던 점과 앞으로의 포부는
인문학 박사 과정은 다른 학문에 비해 아주 길기에 대부분을 생애주기와 함께하게 된다. 친구들의 취업과 진급, 결혼, 출산을 바라보며 나는 저들에 비해 느리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남들과 비교하지 않으려 했다. 느려도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다고 되새겼다. 인문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친구들에게는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 마인드가 중요하다. 교육과 연구의 밸런스를 잘 맞춰 내 공부를 해나가고 학생들에게 좋은 교수가 되고 싶다.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20년 동안 우리대학을 다니며 친구로도, 후배로도, 제자로도 많은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그런데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능력보다 훨씬 본인을 낮게 평가하는 이들이 많아 안타깝다. 그런 후배, 제자들에게 충분히 잘하고 있고, 정말 좋은 우리대학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본인이 하고자 하는 것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가기를 권한다. 


떠든 사람: 
신연경 기자 yeonk486@uos.ac.kr  
박소연 기자 muminsy02@uos.ac.kr  
이채민 수습기자 coals0112@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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